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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모도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분명, 일본말일텐데, 우리나라말로 바꿔보면, '똑바로', '반듯이', '일렬로'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말을 운전을 배우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차를 몰고 다녔고, 운전병 출신인 친구 녀석이 내게 '운전을 잘하려면 모도시를 잘 해야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모도시는 앞바퀴를 '똑바로', '반듯이', '일렬로' 되돌려 놓는 것을 말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면허시험 코스에도 있는, T자 코스, 후진 주차의 경우에 모도시가 쓰인다. 차를 멈춘 상태에서 운전대를 한방향으로 잔뜩 꺾어 후진으로 ㄱ자 형태로 코스에 들어가게 되는데, 뒤바퀴가 들어가는 방향과 일렬이 되면 앞 바퀴도 따라 일렬로 맞춰주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차는 후진으로 ..
가끔 그러는 것처럼, 이전 게시판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글들을 몇 개 읽었다. 바로 이전 게시판의 첫글은 1999년 12월 12일날 내가 올린 글이다. 거기에는 졸업논문이 쓰기 싫다고 적혀 있다. 그렇지. 그 때 나는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 총 2205개의 글들이 있는데, 그게 1999년 12월 12일 부터 시작해서, 다음 다음해, 그러니까 2001년 5월 14일까지 올라온 것이다. 거진 1년 반 동안이다. 초기의 글들을 살펴보면,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99학번 백동현의 글이 반갑다. 99학번, 내가 들녘에 다시 들어간 게 99년도였다. 어떻게 보면, 그 해 들녘에 들어왔다는 점에서는 나와 같다. 보미와 동기라는 것도 신기하다. 그리고 곧 이어, 2000년 봄에는, 00학번들의 이름이 등..
오랜만의 비다. 창문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얼굴을 가린 우산의 행렬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작은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가만히 바라보니, 빗방울 때문이다. 새로 산 테이프의 비닐껍질을 벗겨 카세트 데크에 꽂아 넣는다. 볼륨을 조절한다. 오후.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이미 어떤 하나의 일이 끝난 뒤에, 아니 바로 그것이 끝나자마자, 어쩌면 바로 끝났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다. 가령 전화를 끊자마자 내가 상대방에게 그런 식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얘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다. 그렇다고 도대체 다시 전화를 걸어 그게 아니라 이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미 그 일은 끝난 일이다. 그것은 봉합되었고, 굳어졌다. 나는 안절부절한다. 몹시 불쾌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이런 식' 아니라 이미 행한 '그런 식'이 오히려 내 자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것이 되돌아 생각해서, 참 어리석고 부끄러운 행동이라 해도, 그것이 본래의 나다. 단순하게 ..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이건 오늘 내가 누군가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문장이다. 그 사람은, 그 글을 '나누고 싶은 글'이란 곳에 올렸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나눔을 받은 셈이다. 위의 문장의 주인공을 나는 이미 몇번이나 말했듯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이상한 일이지만, 그 때의 나를 떠올리면 육교가 생각난다. 학교는 육교 너머에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육교를 건너 학교를 갔고, 저녁이면 육교를 건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육교는 아직도 있다. 같은 방향의 친구가 있어서 저녁에는 함께 육교를 건넜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반복해서 '절에 들어갈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분명 절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
고등학교 때 쓰던 연습장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는데, 그게 어디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 문장을 반복해서 쓰던 연습장이었다. 그리고 그 여백에, 그 뒷장에 문장을 적었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 때에도 나는 내가 뭐라 이름 붙일만한 것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같기도 하고, 그냥 짧은 단상같기도 하고, 일기같기도 했다. 때로 편지이기도 했다. 아니면, 언제나 완성되지 못한 소설의 서두였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틈나는 대로 그것을 적었고, 연습장을 다 쓰고 나서도 버리지 않았다. 그 중 몇 개의 것들은 서클의 시화전에 출품하기도 하고, 또 몇 개의 것들은 고등학교 교지에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실었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로 시도 되었다가, 수필도 되었..
계절이 바뀌는 것은 멋지다. 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조금 바깥으로 내밀어본다. 햇빛은 눈이 부시고, 나뭇잎은 짙은 초록빛깔을 띠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인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반팔이거나 민소매 차림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진뜩한 땀을 손바닥으로 훔친다. 나는 내가 중학교 시절 보았던, '라밤바'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항상 여름이면 그 영화를 떠올린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 그 영화를 떠올린 건 여름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마 파랑이거나 초록인 세로 줄무늬 반팔 티를 입고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다. 극장은 충무로의 대한 극장이다. 친구와 나는 동작역에서 전철을 타서 충무로역에서 내렸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그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해 두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한..
책장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꽤 눈부신 햇빛이었다. 열차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나는 잠깐 바깥을 내다본다. 벌써 여름이 온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다시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내리다가, 열차가 달리는 철로와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사이, 다리의 틈으로 강물을 본다. 강물 위에도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씩 출렁거리는 강물은 녹색 빛이다. 바다가 푸른 것은 하늘 빛 때문이라고 한다.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동해가 더 푸르른 것은 염분 때문이라고 한다. 강물이 녹색인 이유는 알 수 없다. 물 속에 녹색 부유물 같은 게 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득 물 비린내를 맡았다고 느낀다. 실제로 맡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열차가 완전히 밀봉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바깥의 냄새가 열차 안에까지 들어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