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운(運)에 대해서 본문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물론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운(運)도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운이란 단순히 복권에 당첨된다거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가까스로 넘겼다든지 하는 게 아니다. 표를 사는데 자기를 마지막으로 매진되었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운을, 우리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미치는 모든 알 수 없는 힘이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운의 한자어 그대로, 그것은 일견 우리와 상관없이 하늘 위에서 빙빙 도는 행성의 궤도 같은 것으로,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것들, 이런 것도 운에 속하는 일이다. 미인으로 태어나는 일이, 잘은 모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그렇게 큰 행운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굉장히 좋은 운에 속하는 일이다.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어깨. 이것도 지금은 어느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인생을 부유하게 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일. 이것은 그 반대다. 이제 와서 양반이나 귀족가문의 출신이란 게 뭐 그렇게 대수인가? 그것보다야 천한 집 안이라도 돈 많은 아버지를 두는 게 훨씬 낫다. 물론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좋은 운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훨씬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요컨대 실력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개인의 노력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지만, 운이란 건 개인의 노력과 무관한 곳에서 진행되고 행사된다. 실력이 개인에 속하는 일이라면, 운은 어쩌면 세계나 시대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이 속한 시대를 상대로 싸우는 건 지극히 어렵고 또 어렵다.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도, 나는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실력 못지않게 운도 중요하다고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 마틴 스콜세즈의 ‘컬러 오브 머니’의 오프닝 장면을 보면, ‘운도 실력이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 영화는 당구영화다. 운도 실력이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운은 운이고 실력은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실력은 운과 무관하지만, 운은 실력과 관련이 있다. 나는 운을 좆으려다가 도리어 실력을 잃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누군가 소설에 대한 나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자 한다면, 나는 그에게 제일 먼저 운을 좆으려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소설을 쓰려 하지 말라고 말이다. 물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연마된 기술이 필요한 일이므로, 그 기술력, 즉 실력을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실력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인정받을 수 있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실력을 넘어선 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운이 개입하는 것이다. 가령, 누가 이 시대에 이런 것을 읽으려 하겠어? 주목이나 받겠어? 평론가들이 좋아하지 않아. 뭐, 이런 유의 말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게다가 마치 소설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소설에 대한 수십 수백 가지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사유가 부족하다느니, 구성이 엉성하다든지, 주제의식이 없다든지 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어디까지가 실력이고, 어디까지가 운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 경계점이 모호하다 해서, 차이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상당히 귀가 얇은 편이어서, 남들이 내 소설에 대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척 민감하다.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면 한 없이 우울해지고, 행여 칭찬이라도 받게 되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방방 뛰어다닌다. 그리고 물론 나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어서 빨리 등단도 하고 싶고, 소위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도 받고 싶다. 그리고 좋은 출판사에서 창작집이라도 내면 더 바랄게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을 좆을 수는 없다. 이를테면 그들(?)이 바라는 소설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은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능력이 안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소설 밖에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등단을 하고, 인쇄된 출판물로 책을 출판하고, 인세를 받게 되는 것 등은 애초에 내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와 무관하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지만, 안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내 스스로가 내 소설을 인정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운이 좋아서 남들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제 일보는 내 자신이 과연 내 소설의 필연성이나 가치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내 소설 안에서 내게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이것은 실력에 속하는 일이다. 그 다음은 운에 맡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또 누군가가 소설에 대한 내 의견을 듣고자 한다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할 것, 그리고 확고한 원칙을 가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 원칙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좋은 운에 속한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나쁜 운이다. 그렇다 해도 말이다, 억지로 그것을 버리고 보편적인 원칙으로 교체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삶 또는 생활은 분명 소설을 쓰는 일보다 더 큰 것이지만, 결코 소설이 그것의 방편이 될 수는 없다. 방편이 된다면, 그것은 좋은 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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