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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에 대해서

물고기군 2002. 3. 31. 00:29

우리 동네에는 빵 가게, 또는 제과점이 두 군데 있다. 그리고 그 두 군데의 제과점, 또는 빵 가게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집에서 출발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제과점의 이름은, 아마 ‘프랑세즈’ 제과점이고, 길을 건너야 하는 곳은 TV에도 심심찮게 광고가 나오는 ‘파리바게뜨’다. 그 광고의 위력 탓인지,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은 길을 건너야 함에도 불구하고 ‘파리바게뜨’였다. 광고효과는 무시할 게 못된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도라고 하는지, 브랜드 파워라고 하는지, 아니면 네임 벨류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신뢰가 간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다지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굳이 찾아서 먹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 이게 라면이나 자장면과 비슷해서, 문득 어떤 날은 몹시 먹고 싶어진다. 그러면 나는 터벅터벅 위에 언급한 ‘파리바게뜨’로 가서 눈에 보기에 맛있어 보이는 빵을 주섬주섬 산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빵의 종류도 참 다양해서 대개는 생전 먹어보지도 못했거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빵들이다. 그렇게 빵에 무심한 나도, 꼭 구체적으로 딱 집어서 먹고 싶어지는 빵들이 있는데, 하나는 고로케(순화된 우리말로는 ‘크로켓’이라고 한답니다.)고, 다른 하나는 슈크림 빵이다.

어느 날 나는 고로케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집에서 출발해 터벅터벅 걸어서 횡단보도를 건너 ‘파리바게뜨’로 갔는데 고로케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길을 건너서 ‘프랑세즈’ 제과점에 가서 고로케 두 개를 샀다. 그런데 집에서 먹어보니, 지금껏 ‘파리바게뜨’에서 사 먹던 고로케보다 훨씬 더 맛있는 것이다. 확실히 광고만으로 모든 걸 판단해서는 안 되는구나 싶어서, 다음부터는 ‘프랑세즈’에서 고로케를 사 먹기로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번에는 슈크림 빵이 먹고 싶어졌다. 지난번의 고로케 경험도 있고 해서 ‘프랑세즈’에서 슈크림 빵을 샀다. 그런데 이 슈크림 빵은, ‘파리바게뜨’가 나은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고로케는 ‘프랑세즈’, 슈크림 빵은 ‘파리바게뜨’에서 사먹는다. 물론 그것이 고로케든, 슈크림빵이든,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더 맛있는가라는 점에 대해선 확신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나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치킨은 역시 KFC다, 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명 파파이스 치킨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고로케와 슈크림 빵 사건을 통해서 내가 깨닫고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경향’이라는 것이다. 경향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할 때만 생긴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일 고로케를 또는 슈크림 빵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두 집의 맛의 차이 같은 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데, 배스킨 라빈스과, 빙그레 투게더 아이스크림의 차이를 알겠는가?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분명한 맛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좋은 것은 정말 좋은 것이고, 명품은 정말 명품이다. 다만 그 차이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수준을 떠나, 개인적인 수준으로 넘어왔을 때, 그때 개인적인 기준이 생기고, 차이의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경향’이 생긴다. 나는 고로케와 슈크림 빵에 대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도식(예를 들면 슈크림의 당도나, 야채의 신선도나, 밀가루 반죽의 점도 등등)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여간 고로케는 ‘프랑세즈’고, 슈크림 빵은 ‘파리 바께뜨’다. (사실 내가 먹어본 가장 맛있었던 슈크림 빵은 학교 앞 빵 집에서였는데, 그 제과점 이름을 까먹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외대 앞이다.) 그리고 경향은 내가 여러 빵집에서 수많은 고로케와 슈크림 빵을 먹어봤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다. 요컨대 다양하게 많이 경험해봐야 한다. 살아봐야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향’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나는 거기에서 또 행복이 발생한다고 본다. 역시 이것도 절대적이고 객관적은 행복은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우리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획득한 것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좋아하고, 또 그것을 다양하게 경험할 때, 비로소 ‘경향’이 생기고 행복이 생긴다. 근데 뒤집어서 생각하면 또한 그 ‘경향’은 우리에게 불행도 준다. ‘프랑세즈’에서 사 먹는 고로케의 맛에서 내가 행복을 느낀다면, 어쩔 수 없이 ‘파리바게뜨’에서 사 먹게 되는 고로케에서는 불행을 느낄 수도 있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걸 아는데, 어떤 이유든지 간에 더 나쁜 것밖에 취할 수 없다면 그것을 불행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의 가짓수가 많아진다면, 그만큼의 불행의 가짓수가 많아지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 가짓수가 적을 때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행복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좋아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자신이 언제나 공평 정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공평 정대하다는 것은 훌륭한 미덕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받고, 칭찬만 듣게 된다는 건, 확실히 부러운 일이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속에 더 큰 지옥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 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편견들로 가득 찬 인간이 좋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너는 편견이 너무 심하다’라든지, 기타 등등의 욕을 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괜찮지 않나 싶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지 않더라도, 극히 몇 몇의 사람들만이 나를 인정하고 좋아해주고 받아들여준다면, 나는 그런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내 자신 안에 있는,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함과 불합리함 등이야말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단점이라고 여기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매력이라고 여길 것들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일이 아닐까? 더 큰 문제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무수하게 많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경향성에 의한 행복과 불행의 가짓수와 마찬가지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물론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개인적인 편견 때문에),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컨대 행복이 경향에 의해 생기는 것처럼, 진정한 관계는 편견을 통해 성립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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