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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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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에 대해서

물고기군 2002. 3. 20. 00:22

내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시절,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볼 수 있게 되고, 또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동기들과 여름방학 동안 여행을 갔었는데, 우리는 어느 날 밤 ‘진실게임’을 했었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록 그것은 말 그대로 ‘게임’에 불과했지만, 첫키스의 시기나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장난 같은 질문이 초반에 몇 차례 이어지고 나서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우리들은 정말로 ‘진실’같은 것들을 얘기하게 되었다. 아마도 여행과 맥주와, 새까만 밤하늘의 별과,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러한 분위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 있었던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신입생들은 벌써 서른이거나 스물아홉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날 서로 나누었던 진실의 내용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으로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모두들 자신의 진실을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조차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은 좋았다. 그래서 결국 뭐가 어떻게 됐는가를 따지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그날 밤 우리들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와 믿음은, 그 짧은 순간과 함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해는 오해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완전히 오해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과연 그럴 수도 있다. 언뜻 들으면 굉장히 멋진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말들로는, 어쭙잖은 여자 하나 유혹하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극단’을 취하는 사람들은 일단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러한 태도를 통해, 타인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비록 그것으로 남을 속이거나 상처주려는 의도는 없을 지라도, 대개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분명히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해한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해는, 어떤 행위나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그러니까 관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시발점이라고 믿고 있다. 이해는 하나의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라는 것은, 자신 안에, 버림으로써 빈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속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다른 사람’은, 언제나 실제의 그 사람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을 마치 자신의 일부분인 것처럼 자기 안으로 품을 수가 있다. 이쯤에서 나도 멋진 말을 해보자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대사 중 일부분이다.) 나는 이 말을 믿고 있다. 그것이 남녀사이의 사랑도, 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제애, 우정, 기타 등등 어떤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 완전한 이해라는 것은, 결국 완전한 사랑에 다름 아니다. 누가 어떤 인간을, 심지어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언제나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해든, 사랑이든,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출발점에 불과하며, 하나의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반복되는 얘기지만, 잘못이다.

이제 나도 서른이 되었다. 아직 젊지만, 예전처럼 젊지는 않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여러 가지 생각들이 바뀌게 된다. 이제는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줄어들게 되고, 만나게 된다 해도 ‘나’라는 개인과, ‘그’라는 개인이 만나기보다, 직책과 지위, 이미 정해진 관계의 틀 안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 만남은 재미없다. 대개 아주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심한 경우, 하루 전체를 그냥 보내버릴 정도로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러나 그것과 별도로, 정작 더 큰 문제는 그 만남이 어떤 것이든 간에, 어느 순간부터는 내 자신이 아예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구태여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 편이 훨씬 편하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해서 내 인생은 더 편해진 걸까?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데 있어, 내게 속한 어떤 것을 버리는 일이 없다 해서 편하긴 해도, 마찬가지로 누구도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너무 힘든 삶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충분히 감내하고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인가?

가끔 나쁜 꿈을 꾼다. 꿈속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들 모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꿈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다. 정말 나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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