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신호등 본문
차로 여자를 데려다 줄 때마다, 여자의 집 근처에서 항상 걸리던 신호등이 있었다. 아니, 항상은 아니다. 간혹 가다 그 신호에 걸리지 않고 통과할 때마다 즐거워했던 기억도 있다. 그 신호는 큰길에서 우회전으로 꺾어진 뒤 짧은 터널을 통과해, 우리가 달리던 큰길과 나란히 놓여 있는 또 다른 큰길과 만나는 사거리 신호등이었다. 터널이 지면보다 낮게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차가 신호에 걸려 정지한 지점은 경사의 꼭대기였다. 차는 금방이라도 뒤로 미끄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신호는 길었다. 나는 핸드브레이크를 힘껏 잡아당겨 걸고, 클러치에서 발을 떼고, 여자 쪽을 바라본다. ‘다 왔어.’ 라고 말한다. 그때 여자가 나를 보며 지었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참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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