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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분명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젊다든지, 젊지 않다든지 하는 것들이 온전히 마음에달린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마모되었고, 닳아 있다. 어떤 것도 마음 깊이가라앉지 않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하고,코 속을 싸하게 하는 공기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 피부는 더러워지고, 몸은 느슨해진다. 「나에게는 찾고 있는 것이 있어요. 뭐였더라, 그게 생각나지 안아요. 그래도찾고 있어요.」 이건 전 번에 말했던 소설의 한 구절이다. 문득 다시 생각났는데, 왜냐하면 나자신,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게 아니라, 내가갖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기 때문.
오랜만에 아침에 도서관을 찾았다.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따져보면 거진 2년이 넘었다. 군대를 제대한 대개의 예비역들이 그러하듯이 한동안 어울리지도 않는 부지런을 떨어서, 내가 6월에 제대했으니까 그해 10월까지 4개월간, 친구의 차를 타고 아침마다 도서관을 찾았다. 성실했던 친구 탓에 거의 매일같이 빼놓지 않고 출근했었는데, 도착하는 시간은 여덟 시 반쯤으로, 우리는 마땅한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고 항상 커피를 마시러 바깥으로 나왔다. 그 해 나는 스물 여섯 살이었다. 그렇다해도 우리 둘 다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과장했으며, 그 심정은 절실했었다. 그리고 이제 즐거운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인사성이 밝은 후배녀석이 도서관 앞 돌계단에 앉아 있던 우리를 향해 알은 체를 할 때면, 새삼 ..
어째서, 어떻게, 어쨌거나, 나는 또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열병처럼 말이 나를 통과하고, 나를 쓰러뜨리고, 나를 커다란 구멍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그 구멍을 눈으로 보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나는 알 수 있다. 어느 날에는 무척이나 술이 맛있고, 어느 날에는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쓰다. 마치 그런 것처럼, 나는 알 수 있다. 아, 또 그 시간인가.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자기모멸의 시기, 죽음 같은 침묵이나, 겨울잠의 시기. 불가항력적이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단지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한 번 지나가면 또 얼마간은 괜찮다. 궁극적인 해결책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어떤 시도도, 결과적으로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
밤하늘에서 구름을 본다. 나는 그 구름이 하얀색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은 하얗다기 보다 파랗다. 구름이 하얗다는 건 편견이다. 구름은 제 빛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마음도 제 빛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안개에 쌓인 다리를 건너본 적 있어요? 너무나 짙은 안개였기 때문에 자신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죠. 그냥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제 곧 끝이다, 나는 다리를 다 건넜다라고 느껴질 때까지 앞 못보는 장님처럼 걷는 거예요. 그래도 다리는 끝이 나지 않죠. 안개에 쌓인 다리는 끝이 나지 않아요. 결국엔 길을 잃고말아요.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 외로웠기 때문에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말죠.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 안주할 수 밖에 없고... 결국엔 다리 위에 집을 짓는 거예요. 안개에 쌓인 다리는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남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요. 그리고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끊임없이 그에게 매달리며 묻죠. 어땠어요? 안개는 이제 걷혔나요? 다리를 ..
항상 똑같은 꿈을 꾼다. 정확히 말해선 꿈이 아니다. (밈이라고 하던가? 스펠링은 생각나지 않는데,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말이나 이미지 또는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건 일종의 '밈'일 수도 있겠다. 근데 그게 항상 똑같은 거다. 학교를 올라가면서 또는 내려가면서 나는 언제나 같은 장면을 떠올리는 거다. 즉, 나는 타자다. 공이 날아온다. 공을 친다. 근데 내가 들고 있는 건, 배트가 아니라 칼이다. 그래서 정확히 공이 두동강이 난다. 마치 양파처럼, 귤처럼. 나는 딱딱한 야구공을 베어내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다. 나는 모든 딱딱한 것들의 안이 궁금한 거다. 그래서 나는 걸으면서 문득, 팔을 휘두른다. 마치 공이 날아오는 것처럼, 배트를 휘두르는 것..
"그래, 따뜻한 행복감. 마치 일요일 오전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의 그런 행복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같은 행복감. 쾌락하고의 차이점은 따뜻한가 아닌가의 차이지. 쾌락은 좀 더 격렬한 거야. 도박성이 있고 게임 같은 거지. 위험해. 대신 강도는 훨씬 강하지. 게다가 빨리 피로해지고 지쳐버리지. 그러나 행복은 다른 거야. 특히 따뜻한 행복은.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어. 위험하지도 않고 격렬하지도 않아. 계절이 바뀔 때에 맡을 수 있는 냄새 같은 것. 매년 똑같은 냄새인데도 좋게 느껴지거든. 행복하단 말이야." - 소설 '리와인드' 중에서
불을 끄는 것만으로 사무실의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또 정신없이 전화를 받고, 본관과 교수회관, 종합강의동을 뛰어다니다가, 또 나보다 열 살이 어린 학부보조조교와, 후배녀석과, 동기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몇 대인가의 담배를 연결통로에서 피다가 바람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가, 혼자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다 먼저 발견하고 누군가를 피해 돌아서다가, 그러다 다시 사무실, 불을 껐다. 하루에 50원씩, 그저 가만히 있어도, 연체료가 붙는 삶. 반납해야 하는데, 자꾸 게을러서 미루고 있다. 이 역할은 맘에 들지 않는다. 이런 비유도 맘에 들지 않고, 이런 식의 어투도 맘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