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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자꾸 들녘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건 정말 들녘의 위기다. 전번 학기에는 '문'정화가 장학금을 받더니, 이번학기에는 '문'상미다. 이런 걸 두고 랑데뷰 홈런이라고 하나? 공부잘하고 성실한 인간을 생득적으로 꺼려하는 나로서는, 들녘이 모인 자리가 불유쾌해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휘와 재영, 특히 재영은 쏙 마음에 든다. 규열이도 만만치 않다. 대체 대학 4학년이 F를 받다니.
농담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한 권의 단어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 했지? 단어장이라는 비유의 골자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단어들에 이름을 붙이고(물론 모든 단어에는 이름이 있다. 아니, 단어가 이름이다.), 단어들에 기억을 붙이고, 단어들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붙인다. 어떤 행운이 있어 미래의 어느 날, 우리의 삶이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마지막 그 순간에 자신에게 남은 것을 헤아려볼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한 권의 단어장일 뿐이라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것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이 갑자기 허무해지는 것도 아니다. 위와 같은 생각의..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나무는 키가 아주 크고, 잎이 무성하고, 바람에 잘 휘어지는 나뭇가지를 가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무성한 잎들은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온몸을 흔들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98년 여름, 나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집에서 전철로만 한 시간을 가야 하는 장지동의 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멀리 있는 학원을 등록한 이유는,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그 학원이 '지정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운전교습을 받고, 바로 그곳에서 시험을 쳐서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학원이다. '지정학원'의 구비요건은 무엇보다 넓어야 한다. 그래서 '지정학원'은 대개 서울의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것이다. 오전반이었는데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해서 기간에 비해 시간을 채우지 못했고, 평일에 ..
단 한번도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언제까지나 하늘에 머물 수는 없다. 그들은 바람 속에서 쉬는 법을 알지 못한다. 회기역 승강대 바닥에서 종종 걸음 치는 비둘기를 아이가 쫓고 있다. 아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자 퍼드덕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새가 지상에서 공중으로 치솟기 위해 몇 번의 날개짓을 해야 하는지, 바람을 타면서 그들의 근육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감히 단언한다. 새들은 쉼 없이 퍼덕거려야 하는 날개대신, 지상에서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다리와, 먹이를 움켜잡을 수 있는 앞발을 꿈꾼다고.
언제부터인지, 남의 글을 잘 읽게 되지 않는다. 뭐라해도, 이 '문리대 앞 벤치'의 글은 꼭꼭 읽었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 남의 글을, 문장을 읽지 않으니, 나도 문장을 쓰지 않는다. 사실을 얘기하지면 집중을 하지 않는다. 날씨탓인지 모른다. 무지하게 덥다.
어제 나는 어떤 이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매일 아침 날씨를 살펴라. 이것이 내 첫번째 충고야.' 말하고 놓고 보니, 근사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날씨를 살폈다. 좋은 날씨다. 좋은 날씨는, 생의 가장 큰 선물이다.
아침나절에 비가 내리더니, 금방 또 하늘이 맑아졌다. 열 두시쯤 오후 타임을 다른 조교에게 부탁하고 학교를 내려왔다. 그 시간에는 또 하늘이 흐렸다. 아주 잠깐 하늘이 맑은 사이에, 바람이 시원했었나? 이런 기분이 들었다. 아, 정말 여름이구나. 다시 또 여름이구나. 거의 전철역까지 내려와서 문득 오늘은 좌석버스가 타고 싶어졌다. 하늘이 흐린 탓인지도 모르고, 좀 지쳐서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좌석버스에 편안하게 앉아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군대를 간 사이에 이사를 했다. 원래는 반포동에 살았었다. 그래서, 학교 앞에서 731번을 타면 전철 보다 조금 멀어도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내려서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이나 더 가야한다. 오랫동안 731번을 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복학한 뒤로, 그..
최근에, '조울증'에 관해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이곳저곳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조울증을 양극성장애라고 부르며, 그에 반한 것이 단극성 장애인, '우울증'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페이지 중에, '우울증 자기진단'이란 게 있어서, 재미삼아 해보았는데, 그 결과를 보고 깜짝놀라고 말았다. 자기진단을 하면서 내내, 질문이 하도 '극단적인' 것들이라, '이거 누가해도 정상이라 나오겠는 걸'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나는 최대한 정직하게 답했고, 가벼운 마음이었다. 위의 것이 내가 받은 테스트 결과다.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다. 아마, 모든 사람들에게 '우울증적인 요소가 있는 편'이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결과가 나왔을 때 내가 느꼈던 이상한 감정은, 오래 나를 붙잡을 것 같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