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1998년 여름, 나무 본문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나무는 키가 아주 크고, 잎이 무성하고, 바람에 잘 휘어지는 나뭇가지를 가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무성한 잎들은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온몸을 흔들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98년 여름, 나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집에서 전철로만 한 시간을 가야 하는 장지동의 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멀리 있는 학원을 등록한 이유는,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그 학원이 '지정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운전교습을 받고, 바로 그곳에서 시험을 쳐서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학원이다. '지정학원'의 구비요건은 무엇보다 넓어야 한다. 그래서 '지정학원'은 대개 서울의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것이다. 오전반이었는데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해서 기간에 비해 시간을 채우지 못했고, 평일에 그렇게 채우지 못한 시간을 토요일과 일요일에 세 네시간씩 몰아서 채웠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짜여진 시간표가 없이 누구나 빈차만 있으면 자유롭게 차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 나는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전철을 탄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인 탓인지, 대개 집에서 몇 정거만 지나면 자리가 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한 시간 내내 멍하니 앉아만 갔다. 서늘한 전철역에서 올라서자 후텁지근한 여름의 대기가 훅하고 끼쳐들었다. 잘 구획 정리된 도로는 넓고,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전철역에서 학원까지 가는 지름길은 낮은 층의 주택가를 가로지른다. 기억해보면 그 동네에서 3층 이상의 높은 건물을 본 적이 없다.
나무는 학원의 운전연습장 뒤편에 있었다. 세 네 그루의 나무가 일렬로 늘어서서, 연습생이 운전하는 차들이 천천히 지나다니는 시험 코스에 넓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 나무 뒤편으로는 이제 공사를 시작하려는 듯 벌건 흙만 일구어 놓은 벌판이었다. 멀리에는 얕은 동산도 보였다.
98년은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학교로 복학한 해다. 학기 내내 여러 가지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았다. 5월에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술을 먹고 친구와 말다툼을 했다. 다음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이 되자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뜨거운 지열과 에어컨도 틀 수 없는 연습용 차안과 내리쬐는 직사광선에 세 네시간을 시달린 뒤 그 대가로 확인도장을 받은 출석부를 학원사무실 서랍에 넣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목 뒤편으로, 등허리로 땀이 흐르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나무들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것 같은데도 나무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멀리서도 나뭇잎 부비는 소리가 들린다. 하늘은 여름특유의 탁한 하늘색깔인데, 구름만은 눈부시게 하얗다. 그 구름이 나무들 위에 떠 있다. 한번도 햇볕에 노출되지 않은 살덩이 같이 풍성하고 하얀 구름이다. 귀에는 한창 유행하는 최신댄스음악이 큰소리로 울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여름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잘 납득할 수가 없어. 나한테 설명을 해줘. 뭐가 달라지길 바라는 건 아니야.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를 설득시켜 줘.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내게 가르쳐 줘.'
그 여름, 나는 스물 여섯 살이었고, 대학 3학년이었다.
98년 여름, 나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집에서 전철로만 한 시간을 가야 하는 장지동의 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멀리 있는 학원을 등록한 이유는,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그 학원이 '지정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운전교습을 받고, 바로 그곳에서 시험을 쳐서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학원이다. '지정학원'의 구비요건은 무엇보다 넓어야 한다. 그래서 '지정학원'은 대개 서울의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것이다. 오전반이었는데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해서 기간에 비해 시간을 채우지 못했고, 평일에 그렇게 채우지 못한 시간을 토요일과 일요일에 세 네시간씩 몰아서 채웠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짜여진 시간표가 없이 누구나 빈차만 있으면 자유롭게 차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 나는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전철을 탄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인 탓인지, 대개 집에서 몇 정거만 지나면 자리가 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한 시간 내내 멍하니 앉아만 갔다. 서늘한 전철역에서 올라서자 후텁지근한 여름의 대기가 훅하고 끼쳐들었다. 잘 구획 정리된 도로는 넓고,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전철역에서 학원까지 가는 지름길은 낮은 층의 주택가를 가로지른다. 기억해보면 그 동네에서 3층 이상의 높은 건물을 본 적이 없다.
나무는 학원의 운전연습장 뒤편에 있었다. 세 네 그루의 나무가 일렬로 늘어서서, 연습생이 운전하는 차들이 천천히 지나다니는 시험 코스에 넓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 나무 뒤편으로는 이제 공사를 시작하려는 듯 벌건 흙만 일구어 놓은 벌판이었다. 멀리에는 얕은 동산도 보였다.
98년은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학교로 복학한 해다. 학기 내내 여러 가지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았다. 5월에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술을 먹고 친구와 말다툼을 했다. 다음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이 되자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뜨거운 지열과 에어컨도 틀 수 없는 연습용 차안과 내리쬐는 직사광선에 세 네시간을 시달린 뒤 그 대가로 확인도장을 받은 출석부를 학원사무실 서랍에 넣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목 뒤편으로, 등허리로 땀이 흐르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나무들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것 같은데도 나무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멀리서도 나뭇잎 부비는 소리가 들린다. 하늘은 여름특유의 탁한 하늘색깔인데, 구름만은 눈부시게 하얗다. 그 구름이 나무들 위에 떠 있다. 한번도 햇볕에 노출되지 않은 살덩이 같이 풍성하고 하얀 구름이다. 귀에는 한창 유행하는 최신댄스음악이 큰소리로 울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여름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잘 납득할 수가 없어. 나한테 설명을 해줘. 뭐가 달라지길 바라는 건 아니야.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를 설득시켜 줘.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내게 가르쳐 줘.'
그 여름, 나는 스물 여섯 살이었고, 대학 3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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