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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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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위엄

물고기군 2000. 7. 8. 00:13
농담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한 권의 단어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 했지? 단어장이라는 비유의 골자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단어들에 이름을 붙이고(물론 모든 단어에는 이름이 있다. 아니, 단어가 이름이다.), 단어들에 기억을 붙이고, 단어들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붙인다. 어떤 행운이 있어 미래의 어느 날, 우리의 삶이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마지막 그 순간에 자신에게 남은 것을 헤아려볼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한 권의 단어장일 뿐이라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것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이 갑자기 허무해지는 것도 아니다.

위와 같은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가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몇 개고 떠올려본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을 붙이지 않은 단어들이다. 가령, 위엄. 명예, 공동체. 어디 이뿐이겠나?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위엄'이라는 단어를 아주 낯설게 바라본다. 심지어 이 단어가 무슨 뜻일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위엄을 가질 수 없다. 대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단어에, 내 존재를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이런 단어는 잘 알고 있다. 유치함, 경박함, 치졸함, 이기적인, 소심함. 아주 친숙한 단어들이다. 그리고, 그 뜻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위엄'이라는 단어에 안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걸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분히 어린애 같은 말투지만, 나는 그런 게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 그게 내 방식이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유치하고 치졸하게 살아나갈 것이다. 소심하고 이기적으로 살아나갈 것이다.

만일, 또 어떤 행운이 찾아와 우리의 죽음 뒤에 또 다른 생이 있다면, 그래서 그곳에 가면 제일 먼저, 이곳의 생에서 우리가 만든 그 한 권의 단어장을 검사 받는다면, 나는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당신은 어째서 위엄이라는 단어를 기입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당신은 왜 당신의 생에서 위엄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럼, 나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니, 변명하지 않겠다. 그 때만은 '위엄'을 지켜야지. 내가 살아온 생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변명하는 것은, '위엄'있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ps : 어째서, '위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걸까? 누군가는 내게 그 이유를 가르쳐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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