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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N.O.X 라는 그룹이 있다. 별 대단한 그룹은 아니다. 남녀 혼성그룹으로 지금의 코요테나, 뭐 기타 시시껄렁한, 기획사에서 대충 얼굴 반반한 남녀를 길에서 주워와 급조한 듯한, 엉성한 그룹이다. 타이틀곡은 댄스곡, 음악적 경향 같은 건 없고, 앨범에는 감미로운 발라드도 몇 곡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1집을 낸 지가 이제 2년이 넘었건만, 2집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번 판을 내봤더니 잘 되지 않아서 기획사조차 포기한 그룹인 것이다. 이 그룹이 그래도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에서 간혹 얼굴을 비치던 시기, 대개 활동시기라고 부르던 때는 1998년 여름이었다. 타이틀곡은 '미치도록'이었다. 그래도 노래방에 가면, 그 곡이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앨범을 사곤 한다. 뭐라고 할까,..
아침에 사당동에 갈 일이 있었다. 아침이라고 해봤자, 11시도 넘어서지만. 전화로 대충 약속장소의 위치를 설명들었기 때문에, 길을 헤메기를 이 삼십분. 육교를 건너라고 했는데, 대체 육교는 어디 있는 거야? 결국 육교를 찾아내고, 약속장소인 제과점을 찾아냈을 때, 나는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에서 헤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반대방향에 택시가 나를 내려다 준 것이다.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고, 심부름할 물건을 건네받고 다시 길에 남아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내가 처음 와보는 동네다. 햇살은 따갑고, 공기는 무덥다. 발 아래로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조금 더 걸어가보기로 했다. 넓다란 공간의 주유소를 지나쳐,..
빌어먹을, 나는 모르겠다. 이런 걸 모르면서도, 잘도 소설을 써 왔군. 하지만, 나는 '하지만'을 압도적으로 더 자주 쓴다.
행복한가, 라고 이제 묻는다면. 글쎄,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냥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이야. 아주 나중에 그리워지겠지. 시간이란 그런 거니까.
한 편의 소설을 끝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하게 나는 그 소설을 수십 차례 읽는다. 물건을 품평하듯이, 여러 각도에서 -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읽어본다든지, 전철의 출입구에 기대어, 모니터 화면으로 등등 - 점검해본다. 물론 그때마다, 내가 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느낌은 조금씩 달라진다. 꽤 괜찮은데 부터, 이렇게 형편없이 유치한 문장을 쓰고도 뻔뻔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줬구나 싶은 자괴감까지. 어떤 때는, 전혀 내가 쓴 소설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느낌은 하나로 고정된다. 단 하나. '무언가 빠져있다.'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노력하고, 조금만 더 매달렸더라면 더 근사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식의 아쉬움이 아니다. 아주 치명적이고, 본질..
어떤 제목의 어떤 내용의 글을 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쓰지 않을 수 없다. 쓰지않고는 못 배기는 문장이 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언제나처럼 운전기사에게 라디오를 틀어달라고 했고, 에어컨이 시원찮은 탓인지, 조금 더웠다. 고가를 탔고, 다시 내려왔다. 세종 호텔 앞은 너무 환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내내, 그의 뒤틀린 팔을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생의 무게를 버텨내기에 너무나 허약하다. 누군가는 자신을 단련시키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을 가볍게 하는 법. 내 가벼움은 초라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뒤틀린 팔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어째서... 어째서 자기 생을 가볍게 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거지. 어째서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어째서 한 발쯤 뒤로 물러..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군대를 가기 전, 내 방은 4층이었고 책상 옆으로 창이 있었다. 창을 통해 보이는 거리라고 해봤자, 아주 단조로운 아파트촌의 풍경이었지만 가끔 그 풍경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진다. 가로등이 있었고, 빼곡이 주차된 차들, 키 큰 나무들이 있었다. 그 집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새벽에 눈이 오면 가로등 불빛 속으로 날리는 눈발을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바라보곤 했다. 바로 맞은 편 가까이 똑같은 층의 아파트 건물이 있어서 하늘이 넓게 보이지 않았지만, 맑은 날의 새하얀 구름이나 잔뜩 찌푸린 날의 흐린 하늘 빛깔도 좋아했다. 아,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 시절 나는 이런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불현듯 좋은 노래가..
언젠가 '우는 여자 모티브'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사실 '운다'는 행위와 '여자'를, 그렇게 함부로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우는 여자'와 '우는 사람'이라는 두 개의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설혹, 그 '우는 사람'이 '여자'라 할지라도 굳이 '우는 여자'라고 말하는 방식은 또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우는 여자'가 '우는 사람'과 다르게 생산하는 의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는 여자'는 정말로 하나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티브가 될 수 없으므로.) 그것과 다르게, '운다' 더 구체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는, 문득 생각난 건데, 참 신비롭다. 경험적으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