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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에 도착하면 바로 방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딴에는 방청소를 말끔히 끝마치고 나면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마지막 리포트를 끝으로 이번 학기도 완전히 끝이 났다. 모두가 퇴근한 과사무실에서 한참을 있었다. 담배도 태우고 음악도 듣다가 발이 시려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는 모든 생각들이 생각으로 그치고 마는 것처럼, 나는 방청소를 끝마치지 못하고 또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밤 12시를 넘겨버린다.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이것은 최근의 내 혼잣말. 불평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지금의 내 처치는 확실히 불평하기에 너무 사치스럽다. 나는 완벽한 것을 추구했던가? ..
메시지가 왔다. "오빠가 전에 했던 말 진심인지 다시 묻고 싶어졌어, 기억나?" 번호는 모르는 번호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컴퓨터를 켜고, 카세트 데크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회신전화번호대로 전화를 걸었다. 금방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세 번쯤, 그 정도 듣다가 전화를 끊었다. 내가 모르는 목소리다. 내가 모르는 목소리인데, 자꾸만 내가 아는 목소리를 닮아 가는 것 같아, 전화를 끊었다. 어리석다.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왔다. 친구 중에 처음이다. 물론 친구가 아니라, 형제거나, 여자 동기거나, 또는 잘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을 참석한 경우는 있다. 매번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가 입장하고 주례사가 있고, 마침내 피로연장에서 어쭙잖은 식사를 할 때마다 나는 한없이 그 자리가 불편하고 지루하고 어색해진다. 딴은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사람을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딴은 잘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건 이런 느낌이다. 가령 나는 오늘 그 친구를 항상 개인적인 자리에서만 만나왔고, 단 한번도 그의 가족들이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친구는 내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니, 그건 느낌이 아니라..
찾는 책이 없어서 온 방안을 뒤지다 계획에도 없는 방 청소를 하게 되었다. 상자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조금 가슴이 아파졌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라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옳음은 언제나 누구의 옮음이고, 그름은 언제나 누구의 그름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인정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인정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이다. 요컨데,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물어왔었다. 감히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내 자신이 언제나 '적자'나 '부적자' 둘 중의 하나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야, 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꼭 내 발 밑을 가리키며, 너는 '적자'이기 때문에, 또는 너는 '부적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충고한다. 그 상황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누구도 다리를 땅..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정말로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벌써 스물 아홉 살이고,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아니 학생도 아니라고 부끄러워한다. 저녁 TV에서 부자들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어느 소설에서 부자는 마치 휘발유가 필요 없는 인공위성과도 같아서, 그들이 부자로 계속 있기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그 얘기였다. TV 속의 부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일 낮에 골프장이 만원이다. 외제차를 몰고 고급 레스토랑이나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나이 어린 녀석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헬기에서 촬영한 강남의 고급 주택가의 모습은, 우리나라가 아닌 줄 알았다. 바깥에서는 담이 높아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채널을 바꿨더니, 실직..
필통을 잃어버렸다. 과사무실에 두고 왔겠지 생각했는데, 없다. 그 필통은 꽤 오래된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고 두 달 뒤, 나는 약 6개월 동안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6개월은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막 사귀기 시작한 즈음엔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군대를 갈 때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 나는 그런 걸 마음 깊이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어딘가로 가기 전에, 여자를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금방 끝날 관계만을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로였을 거다. 우리는 형광등 불빛이 환한 햄버거 집에 있었다.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늘어놓다가, 필통이 없어, 라고 말했다. 필통뿐만 아니라, 펜도 뭐도 없었다. 여자는..
...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시청의 층계로 나갔다. 선선하고 맑은 날씨였다. 저 멀리까지 보였다. 하지만 벨마가 간 것만큼 멀리까지는 아니었다. - 레이몬든 챈들러 [안녕, 내사랑] 마지막 문장 ps : 부연 설명을 하자면, 위에서 '나'는 그 유명한 '필립 마로우'. '벨마'는 클럽에서 일하다 남자친구를 배신하고 신분을 감추고 늙은 백만장자의 부인이 된 여자. 감옥을 갔다온 남자친구가 벨마를 찾으러 옛 클럽을 찾아간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소설의 마지막, 결국 남자친구는 벨마를 붙잡는다. 그러나 벨마는 남자친구를 권총으로 죽이고 도망을 친다. 이것으로 일단 소설을 일단락된다. 그리고 그녀는 석달 뒤, 어느 클럽에서 경찰에게 붙잡히고, 붙잡힌다 해도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