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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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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통

물고기군 2000. 11. 29. 00:18
  필통을 잃어버렸다. 과사무실에 두고 왔겠지 생각했는데, 없다. 그 필통은 꽤 오래된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고 두 달 뒤, 나는 약 6개월 동안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6개월은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막 사귀기 시작한 즈음엔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군대를 갈 때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 나는 그런 걸 마음 깊이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어딘가로 가기 전에, 여자를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금방 끝날 관계만을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로였을 거다. 우리는 형광등 불빛이 환한 햄버거 집에 있었다.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늘어놓다가, 필통이 없어, 라고 말했다. 필통뿐만 아니라, 펜도 뭐도 없었다. 여자는 내가 떠나기 전에 필통을 사줬다. 그게 1998년 가을이니까, 벌써 3년 전 일이다. 3년은 꽤 긴 시간이다. 다음 해 봄에 나는 그녀와 헤어졌고, 필통만이 남았다. 그리고 오늘 그 필통도 잃어버렸다.
  나는 뭘 잘 잃어버리는 스타일이다. 얼마나 잘 잃어버리냐면 한동안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 정도다. 지갑이 없다면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근 2년 동안 워크맨을 세 개나 잃어버리고, 아직껏 워크맨을 사고 있지 않다. 그다지 주의가 산만하거나 덜렁거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물건만은 잘 잃어버린다. 그 탓인지 모른다. 뭔가를 잃어버려도 그다지 안달을 부리지 않는다. 쉽게 포기한다. 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잘 포기하게 된 건지, 잘 포기하기 때문에 잘 잃어버리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나는 뭔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필통을 예로 든다면, '어제까지의 나는 필통을 가지고 있는 나였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필통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다. 그게 뭐 가슴 아파할 일이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하기 위해 흐르는 거다. 우리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시간을 멈추게 만들면 된다. 그러나 아무도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고, 아무도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사고방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가끔 어떤 것들은 오래 간직해야만 했었다고, 오래 지켜야만 했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바보짓이다. 결국, 무언가를 영원히 우리가 가질 수 없고,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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