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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오늘은 참 위로받고 싶은 하루입니다. 누군가 있어서,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그건 내 잘못이야.’라고 말해야할 테지만. 직원 두 명이 그만두었고, 18만 원짜리 티 포트와 8만 원짜리 커피 잔이 깨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직원 두 명이 그만 둔 건 함께 일하던 다른 직원과 싸운 게 계기가 되었고, 컵을 깬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변명이 될까요? 제가 카페를 맡은(?) 후로, 지금껏 한 명의 직원이 월급 받은 다음다음날 아무 말 없이 나오지 않았고, 한 명의 직원은 제가 해고했고, 그리고 이제 두 명의 직원이 제게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나갔습니다. 이 모든 일이 고작해야 두 달도 못되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전에도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그리스 사람들은 부고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열정이 있었는가?’ 요즘 카페를 운영(?)하면서 여러 사실들을 새삼,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는데 오늘 문득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열정’과 ‘수완’의 문제입니다. 만일 사람을 뽑는데, 한 사람에게는 수완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열정이 있다면,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수완과 열정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뽑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고(왜일까요?), 문제를 아주 단순화시켜서 대답하라고 한다면, 저는 열정이 있는 사람을 뽑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정과 수완, 둘 다 일을 하는데 있어, 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래도 ..
이야,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잘들 지내고 계시겠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역시 오랜만에, 정말 근 두어 달 만에 밤을 꼴딱 새고 말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잘 모르겠군요. 특별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창 밖으로 벌써 하늘이 희뿌옇게 밝았습니다. 이제 막 방의 전등을 껐습니다. 뭐랄까. 제가 처음으로 밤을 새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그날을 잘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때 제가 밤을 샜던 이유는 단지 밤을 샌다는 게 뭔지 궁금해서였습니다. 밤마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밝아 있더라, 그렇다면 제가 잠을 자던 그 시간은 대체 무엇일까, 뭐, 이런 게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졸린 눈을 억지로 부비면서 형과 카드놀이를 하면서 새벽까지 버텼습니다. 근데 형은 왜 그날 밤을 샜을까요..
기분이 우울할 때는, 진공청소기를 돌리세요. 진공청소기가 없다고요? 그럼, 사세요. 10킬로가 넘는 볼링공도 들어올리는 강력한 파워의 진공청소기도 십 몇 만원 밖에 안한답니다. 게다가 카드로 구입하면 3개월까지 무이자예요. 대신 코드는 긴 걸로, 흡입구의 브러쉬는 180도 회전이 가능한 걸로. 안 그러면 오히려 짜증만 더해질지도 몰라요. 자, 준비가 됐으면 전원을 켜세요. 소리가 들리나요? 위이이잉. 구석구석 묵은 먼지를 힘껏 빨아들이는 거예요. 부스스한 머리라도 상관없고, 속옷 바람이라도 괜찮아요.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고, 진공청소기를 끌면서 춤이라도 출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하세요. 바퀴가 잘 굴러갑니까? 먼지가 빨려 들어가는 게 보이나요? 기분이 어때요? 알겠죠? 기분이 우울할 때는, 진..
최근에는, 그러니까 ‘톨게이트’ 이후, 제가 쓴 소설을 되풀이해서 읽지 않습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몇 번 읽기는 합니다만, 예전처럼 열심히 읽지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걸까요? 뭔가 미진한 얘기의 부분을 보충하고, 잘못된 문장, 또는 껄끄러운 문장들을 수정하기 위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입으로 발음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소설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의 어떤 부분, 분명 엉성하고 못난 부분을 깎아내는 작업이었겠지만, 때로 그렇게 깎아내서 남게 될 어떤 것이, 과연 나인가..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게 인생이라고? 뽕짝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함성호, 너무 아름다운 병 中- * 아, 술먹고 싶어라. 근데 여기서 '술이나 쳐'는 무슨 뜻일까요? '술이나 쳐먹어라.'의 뜻인지, 아니면 '술을 치워라.'라는 뜻인지, 아니면, '술잔을 마주쳐라.'라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마지막 시구가 제 가슴을 확 움켜잡는군요. '또 봄이잖니.' 그래, 그래. 또 봄이라고. 미치겠네.
취침시간이 늦어지면서, 역시 기상시간도 점점 더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곱시경에는, 자명종 대용으로 맞춰놓은 라디오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홉 시 반, 라디오 소리에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았습니다. 내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몸은 이미 알고 있는데, 머리는 바보같이 모르고 있습니다. 구두방에 가서 벨트 구멍을 뚫었습니다. 원래부터 헐거운 벨트라서 진작에 구멍을 몇 개 더 뚫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일까? 4년이나 되었습니다.농담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벨트에는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
며칠 전, 햇빛에 눈이 부셔 이마 위로 손가리개를 만들다가, 문득 내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었지만, 그 방향이 서쪽인줄 몰랐던 것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껏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저에게 ‘동서남북’같은 방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보다, 전철역 방향인지, 학교 방향인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문득 그 방향이 서쪽이란 걸 알게 되자, 많은 것들이 달라보였습니다.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고, 또 이상한 일이지만 굉장히 좁아진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문장을 썼습니다. ‘오후 여섯시, 우리는 서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원고지 13매 정도의 아주 짧은 분량입니다. 사실,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