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물고기통신 (181)
시간의재
‘큐브’라는 영화를 보면, 모든 수수께끼를 풀고 바깥 세계로 나가는 통로가 열렸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세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은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왜?’ 그러자 그 남자는 이렇게 대답하죠. ‘무서워.’ ‘뭐가 무서워요?’ ‘인간의 끝없는 욕심.’ 참 시시한 말이라는 걸 압니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려던 것이, 한낱 이솝우화 같은 교훈이었다는 실망도 듭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그 시시한 말 한마디가 제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뭐가 무섭지? 인간의 끝없는 욕심. 시시한 말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뭔가 그럴듯한, 또 의미심장한 말들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증명하고도 싶었고, 또한 그렇게 살기도 바랐습..
차창문을 열고 초여름밤의 뻥 뚫린 대로를 달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는 거야. 만일 갈 때만 있다면 말이야. 이 시간이나 세계에 대해, 또는 나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은 없는 거지. 지독한 시간들은 무시하고 좋은 시간에 집중할 것. 지독한 - 시간들은 - 무시하고 - 좋은 시간에 - 집중할 것. (Ignore the awful times,and concentrate on the good ones! ) 이게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 - 단상들 중에서 -
아래 제가 쓴 ‘물고기통신 59’를 올려놓고 다시 한번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모기를 잡음으로써 뭔가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최근에 누군가에게 제 소설에는 ‘나’가 너무 많다, 또는 강하다, 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말이 옳다면, 즉 그가 제대로 읽은 거라면, 그것은 내가 문장을 통해서 ‘나’를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어떻게 사는 게 정말로 현명한 삶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스무 마리의 모기 시체를 마루바닥에 모아놓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분명 거기에는 허무 같은 게 느껴지지만, 산다는 것이 어떻게 뭔가를 성취함으로써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제 저녁 마루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작정하고 모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훈증 홈매트도 떨어지고, 뿌리는 모기약도 다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여름도 아닌데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를 참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탓입니다. 가을이 되어서까지 모기에게 피를 뺏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추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잡은 모기가 근 스무 마리를 넘었습니다. 열 마리를 넘기면서부터 제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껏 저는 한 마리를 잡으면 당연히 집 안의 모기가 한 마리 줄어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에는 방충망이 쳐져 있고, 바깥으로 통하는 출입문도 닫혀 있었으니까요. 과연 진실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지만, 열 마리, 그리고 종국에는 스무 마리의 모..
날이 추워졌습니다. 저녁이면 이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고, 지난 가을의 기억도 떠오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날이 추워지기 시작한 건 고작 며칠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며칠 전만 해도 이렇게 갑자기 가을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래왔던 일입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의 기한을 잘 지키지 못하는 성격의 저로서는, 이런 계절의 변화란 것이 때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합니다. 계절은 참을 성 없는 여자친구 같기도 하고, 매정한 창구 직원 같기도 합니다. 이봐, 조금 늦을 수도 있잖아. 그것 가지고 뭘 그래. 이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안됩니다. 어저께 왔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걸, 지금 와..
나는 참 시시한 인간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아, 시시하다, 나는 참 시시하다, 중얼거립니다. 아, 시시하다. 그 마음이 화가 나는지, 슬픈지, 아니면 그저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마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두려움은, 그 시시함이, 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되지나 않을까에 있습니다. 시시한 인간은 시시한 짓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자꾸 욕심을 냅니다.
제가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그것이 저의 잘못도, 당신의 잘못도 아니란 점이예요.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요. 누가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모두가 책임지고 싶어 하지만, 또 아무도 책임질 수 없죠. 잘못은 사라지지 않아요. 아무에게도 죄가 없지만, 모두가 벌을 받고 있어요. - '손톱깎이'중에서
최근에 쓴 문장 중의 하나. ‘많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쓸 때는 잘 몰랐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 문득 다시 떠올랐습니다. 바로 지금 말입니다. 방 안에서 담배를 찾다가, 아까 집으로 오는 길에서 사는 걸 깜박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제 머리 속에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은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하여튼 그것은 깜짝 놀랄 만큼 파란 하늘이고,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구름입니다. 참 흐뭇한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