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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며칠째 밤에 잠을 못자고 있습니다. 며칠째 많이 밥을 먹고, 많이 티브이를 봤습니다. 새벽 다섯 시 무렵이면 벌써 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새벽 세시부터 마루에 누워 케이블 티브이를 보기 시작해서, 점점 밝아지는 실내에 마음이 무거워졌는데, 그러다 문득 어떤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저는 제가 배운 것을 문장으로 쓸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참 많은 것들을 새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었는데, 그래서 그것들을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고 느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배운 것, 알게 된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써서 누군가에게 전달한 만한 가치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쓸 수 있는 건, 아..
“난 말이지, 실은 아주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갖고 있어. 즉 인생은 호러블(horrible)한 것과 미저러블(miserable)한 것 두 종류로 딱 나눌 수 있는데, 호러블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지. 예를 들면 장님이나 절름발이처럼 말이야. 음 또 미저러블은 그 이외의 모든 것이야. 그러니까 말이지,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들은 미저러블한 것에 오히려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 우디앨런 "Annie hall (1977)"
얼마 전에 티브이에서 일일 드라마를 보는데, 거기에 아주 착한 며느리가 나왔습니다. 매일매일 빠트리지 않고 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 거의 언제나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본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줄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이야기만 어렴풋이 알 뿐입니다. 시어머니는 아주 못돼서, 처음에 그 착한 며느리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날 정도로 구박을 합니다. 거기에는 또 어떤 사연이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것은 사뭇 전형적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말 그대로 일일 드라마다운 내용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시어머니가 다치게 되고 거동을 못하게 됩니다. 매일 구박만 당하던 며느리는, 너무나 착했기 때문에, 또 병든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합니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의 진심을 ..
라디오를 듣다가, 디제이가 비가 그쳤다고 하더군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비 그친 새벽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담배도 한 대 피고, 캔 맥주도 마시고, 이런 저런 생각도 했습니다. 알아요? 우리가 정말로 안타깝고, 슬퍼해야 하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배반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밖에 배울 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고통 그 자체가 진실인 것처럼, 그것이 무언가를 증명할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흔히 잘못을 가르쳐주지만, 그러니까,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 받는 거야, 라고 생각하게 하지만, 사실 진짜 우리의 잘못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
이제 작품을 올렸는데, 고백하자면 사실 이것은 새작품이 아닙니다. 파일의 문서정보를 보니까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건 2002년 3월 6일로, 작품의 순서를 보면, ‘서쪽으로 난 길’을 쓰고 나서, 그리고 ‘커피 잔...’을 쓰기 전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완성했지만, 영 아닌 것 같아서 올리지 않은 작품입니다. 한 일주일 전에, 하도 지금 붙들고 있는 소설이 안되길래 이거라도 대폭적으로 수정을 해서 구제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끙끙대며 조금씩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젯밤 저의 편집자(?)가 읽어보더니, 이대로도 괜찮다, 다만 앞부분만 날려버리라고 했고, 충고대로 그렇게 하고 보니, 훨씬 나아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길게 설명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작년의 그것에서 거의 ..
“나는 서른 살입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자기를 속이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에는 내 나이가 다섯 살이나 더 먹었어요.”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어떤 말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은 때로는 굉장히 오랜 시간일 수 있는데, 새삼 그 말의 의미를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말이 특별히 어렵고 의미심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하고, 판에 박은 말일 수도, 또 굉장히 유치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흔한 말이고, 말해놓고 나면, 그게 뭐야,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이 되면, 새삼 ‘절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는, 작년 가을 방영되었던 티브이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대사입니다. ‘내가 뭐해줄까요?’ 이것은 극중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자(좋아해도 되요?), 남자가 그 대답으로 한 말입니다. 물론 그때도 참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멋진 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