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물고기통신 (181)
시간의재
나는 때때로 가을날 휴일 오후의 공원을 떠올린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풀 냄새가 나는 공원이다. 잔디밭이 눈 닿는 데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희미하게 열차소리도 들린다. 나무 그늘이 비껴 간 벤치에 앉아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녀의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과, 발 밑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에 관한 얘기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땐 잘 모른다.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엔 나 혼자 그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대부분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내 옆에 앉아서 담배를 나눠 피기도 한다. 뭐라해도 모두가 행복한 가을날의 공원인 것이다. 이제 그 시절의 일을..
술을 한잔 했습니다. 같이 있던 여자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조금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그냥 걸어본 것이 말이죠. 그래요, 예전에는 참 많이도, 술을 먹고 밤거리를 걸었더랬죠. 옆에 누군가 있는 경우도 있고, 저 혼자 괜히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나, 또는 떼를 쓰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그리로 갈 테니 나오라고, 그렇게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슴 설렙니다. 오늘은 갈 데가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또... 슬픔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래요, 저는 조금 슬퍼졌습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저의..
“때로 나는 진실을 발견했다고 믿었어. 그리고 그건 실제로 진실이었지.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론 만일 그것이 진실이기만 한다면, 그 가치에는 절대성이 부여되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이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거기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 똑같은 진실이고, 똑같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지만, 그래서 때로 기쁘고 때로 가슴 아프지만, 어떤 것들은, 그러니까 어떤 진실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고, 바로 그때가 죽을 때지. 그것은 그때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거야. 가장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가장 늦게 알게 되지만, 결국에는 가장 빠른 셈이지.” - 손톱깎이 중에서 - ..
오랜만에 에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트루먼 카포티의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라는 단편 중의 한 구절입니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우리가 언제나 눈으로 보고 있는 것. 이 소설은 꽤 오래전에 읽은 것입니다. 그러다 어제 문득 누군가와 채팅을 하다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좋은 소설입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워드로 쳐서 전문을 올려보고 싶습니다. 새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첫문장을 쓴 건, 작년 6월의 일인데, 그동안 참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또 그동안 내용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예상컨대 3분의 2정도를 쓴 것 같은데, 이번 달 내에는 끝내보려고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완성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완성시키기도 전에 (초고도 내지 못한 채..
낮잠을 잤습니다. 자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마루 소파(침대?)에 누워 여느 때처럼 케이블 티브이를 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꿈을 꿨습니다. 깨어나고 나서, 당연하게도 그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꿈에서 저는 누군가를 목마태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어린 자식에게 그러하듯이. 무서워하지 말고, 이제 두 손을 놔도 돼, 내가 꽉 붙들고 있으니까. 따뜻한 겨울 한낮, 한참 마음이 좋았습니다.
눈이 내립니다. 저녁에 카페에서 일을 하다, 잠깐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왔다가 눈이 내리는 걸 처음 발견했습니다. 주차된 자동차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서, 제가 모르는 새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제가 모르는 동안에 조금씩 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눈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마치 깜짝 파티 같은 기분이 듭니다. 숨어 있던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축하해, 축하해, 소리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멋쩍게 머리를 쓸어내립니다. 이 눈이 올 겨울 들어 몇 번째 눈인지 알 수 없지만, 제게는 마치 첫눈 같았습니다. 2002년 겨울 첫눈은 12월 30일 날 내렸다고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카페를 마감하고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제 고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벌써 10년..
‘테스’라는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중학교 때 읽었는데요, ‘그레이트 북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었습니다. 판형이 현재 나오는 소설책보다 작고, 세로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법 긴 소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읽기 시작하자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거의 밤을 새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밤, ‘테스’라는 소설을 읽고 있는 저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읽는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 책을 책상 위에 엎어 놓고 화장실로 갑니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바라봅니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가족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사방은 고요합니다. 멀리서 빠른 속도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다시 노란..
달빛이란 참 신비한 겁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신비한 달빛에 대해, 그리고 그 달빛 아래 서 있던 나에 대해, 뭔가를 써보고자 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써 본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늑대인간의 귀환’이란 소설에서 제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은 그 달빛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그것을 써보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저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하던 중, 카페의 정원에서 문득 다시 한번 그 달빛 아래 서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면서 그 달빛에 비친 휑한 정원의 풍경과,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을 애잔하게 하면서, 동시에 행복하게 합니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