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예전에, 그게 얼마 전의 일인가요, 제가 대학사무실에서 조교를 하던 시절에 공사문제로 얼마간 옆 건물로 사무실이 옮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때는 여름이었는데, 문제는 옮겨간 사무실의 위치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어쩌면 9층이었는지도)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개 학과 사무실이 한 방을 썼었는데 같이 방을 썼던 다른 학과 조교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아예 그편에서는 업무자체를 중단한 듯했습니다. (정말일까요?) 방학 기간이었으므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내내 나와야 할 필요는 없었고, 저도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출근을 하는 날에는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당시 유행하던 과즙맛이 약하게 섞인 생수를 샀습니다. 그리고 8층인가 9..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일 중의 하나는, 흔히 말하는 ‘기브 엔 테이크’라는 개념이다. 주는 만큼 받는다. 또는 받는 만큼 준다. 이것은 20세기, 아니 21세기가 추구하는 ‘합리성’의 한 얼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합리성이라는 것이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20세기나 21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기원전, 아니 선사시대의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결코 이것은 인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적이라는 것과 이성적이라는 것은 사실 잘 따져봐야 할 문제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의 ‘이성적’이라는 개념은 인간적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동물적이다. 그러니까 동물의 세계야말로 ‘기브 엔 테이크’가 통용되는 합리적인 세계라는 것..
한해가 또 가는군요. 물론 그렇죠. 언제부터인가, 한해가 간다는 것이, 또 한 살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안 그런 때도 있었겠죠. 다음 해 대학생이 된다든지, 제대를 한다든지, 복학을 한다든지. 아니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말이죠. 뭔가 기대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거죠. 한편으로 사실은 ‘아직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어떤 것을 원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자꾸 ‘그것’과 현재의 나 자신과 처지를 비교하니까 그런 거겠죠. 그것은 단순히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한 어떤 것은 아닐 겁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 이런 것들만은 아니겠죠. 물론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최근에 제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어떤 곳에서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는 ‘높고 커다랗고 전체적으로 사각기둥의 형상을 한’ 아파트가 보입니다. 그것은 아파트이긴 한데 다른 일반 아파트들과 다르게 불립니다. 그 명칭은 아마도 관리를 위한 행정분류상의 명칭일 것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특징들이 있고, 그 명칭을 얻기 위해서 따라야 하는 건축법상의 자격요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것은 ‘주상복합건물’이라고 불립니다. 어쩌면 좀 더 정확하고 공적인 명칭이 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시공사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아파트..
제가 아직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는 ‘국민학교’ 시절,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거진 20년이 되어가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저는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친하게 지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건 아마 5학년이나 6학년 때였을 텐데, 그 친구는 반장이었고 육상부였으며, 당연하게도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기고 몸매도 좋있습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것에 비해 뻐기는 스타일도 아니었죠. 한 마디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요소를 모두 갖춘 그런 친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게 말을 걸어주거나 친한 척 해주면, 괜히 저 자신조차 우쭐거리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친구와 관련된 여러 기억이 ..
예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알았던 여자는 자신의 신체 중 가장 매력적인 부분으로 뒤통수를 꼽았다. 한번 만져보라고 해서, 그때껏 손 한번 제대로 잡지 않았던,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사실 우리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서 나는 그 당시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또 그녀도 딱히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남자 자체에 아직 흥미가 없다고 했지만 그건 아직 적당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그녀에게 적당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셨다. 영화를 같이 보기도 했다. 생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케이크를 사서 카페 같은 곳에서 촛불을 켜고 조용하게 노래를..
‘아파트’를 쓰고 나서 다음번에 쓸 때는 꼭 이렇게 써야지 라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대화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화를 많이 써야겠다. 둘째, 확실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써야겠다. 그렇게 해서 첫 문장을 썼습니다. 어떤 밤, 어쩌구 저쩌구…. 그 다음은 모르겠고, 어쨌든 끝까지 썼습니다. 이 소설은 세 개의 ‘밤’ 이야기인데, 첫 밤은 쉬웠고, 둘째 밤은 뭐가 뭔지 모르겠고, 셋째 밤은 어려웠습니다. 쓰기가 말입니다. (어렵게 쓸수록 읽기도 어렵고 재미도 없습니다.) 이런 얘기까지 할 이유는 없지만 원래는 둘째 밤에서 끝을 내려고 했습니다. 셋째 밤은 마치 사족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둘째 밤까지 쓰고 나서..
물론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알게 된다고 해서 인생이 무작정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믿듯이 지식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이든, 아니면 사회적인 문제이든. 지식은 그 외양과는 달리 자주 무력합니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완전하게 인정하면, 지식은 많은 경우에 있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시절,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죄책감일까요? 모든 것입니다. 이른바, 누구도 완전히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