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물고기통신 108 -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본문
예전에, 그게 얼마 전의 일인가요, 제가 대학사무실에서 조교를 하던 시절에 공사문제로 얼마간 옆 건물로 사무실이 옮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때는 여름이었는데, 문제는 옮겨간 사무실의 위치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어쩌면 9층이었는지도)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개 학과 사무실이 한 방을 썼었는데 같이 방을 썼던 다른 학과 조교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아예 그편에서는 업무자체를 중단한 듯했습니다. (정말일까요?) 방학 기간이었으므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내내 나와야 할 필요는 없었고, 저도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출근을 하는 날에는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당시 유행하던 과즙맛이 약하게 섞인 생수를 샀습니다. 그리고 8층인가 9층의 사무실에 올라가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어떤 날에는 점심을 건너뛰면서 퇴근시간까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초반에 몇 번인가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하면서 생각만큼, 아니 생각이상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어찌된 일인지 아침에 처음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제 올라가면 저녁까지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또는 않겠다, 라는 점이 저를 기분 좋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한 번 올라가 있으면 아까 말했던 다른 학과 조교는 물론이고, 저희 학과 학생, 조교, 강사 등 거의 누구도 그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뭐라 해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인가 9층에 있었으니까요. 그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으로 짐작하다시피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계단을 오를 때나 복도를 걸을 때면 오래된 건물 특유의 돌 냄새, 습한 곰팡내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것은 나쁘다기 보다 오히려 친근한 냄새였는데, 마치 오랫동안 햇빛이 들지 않아 짙게 밴 그늘의 냄새 같았습니다. 반팔 셔츠 밖으로 드러난 맨살에 서늘한 느낌이 듭니다. 사무실에는 하늘로 난 창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나 있었는데 입구에서부터 그 창까지의 거리가 사무실의 전체 길이였습니다. 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편의점에서 사온 생수를 창 앞의 책상 위에 놓고 창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도 읽고 담배도 피우고, 몇 가지 업무도 처리합니다. 몇 통의 전화가 옵니다. 하지만 급한 일은 아닙니다. 저를 그곳에서 끌어내지는 못합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사무실에 저 혼자라서 당장은 갈 수가 없고요, 이따 퇴근하기 전에 들르겠습니다. 예, 예, 제가 있는 곳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또는 9층)이라서 그렇게 쉽게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 높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또다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에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베이터가 없다거나 5층이란 점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1층보다는 계단이 많긴 하지만, 5층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실제적인 연관성도 없고, 비유적인 연관성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그 시절에 제게 걸려왔던, 아니 저라기보다는 사무실에 걸려왔던 전화들을 떠올립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또 포트의 물을 끓여 일회용봉지커피를 일회용 컵에 담아 마십니다. 담배도 피웁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여름의 구름을 보기도 하고, 하여튼 시간들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어쨌든 저를 그곳에서 나오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아니 애초에 올라가야 했던 목적을 주었던 그 전화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일에 무관심한 것만 같은 세상이 나에게 ‘거기 있어라, 그 자리에 있어라.’라고 말해주는 듯한 전화입니다. 물론 그것은 제 전화가 아닙니다. 요컨대 저는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요. 또 저는 그 전화에 대고 ‘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저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라고요. 퇴근시간이 되면 저는 책과 필기도구 등을 가방에 집어넣고 컴퓨터를 끄고 책상 앞에서 일어섭니다. 문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고 무언가 놔두고 온 것이 없는지, 끄지 않은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벽면의 형광등 스위치를 내립니다. 날은 아직 어둡지 않아서 아주 조금 사무실 안이 어두워질 뿐입니다. 문을 닫고 열쇠를 문고리에 꽂고 문을 잠급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립니다. 저는 시계를 보고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음을 확인합니다. 무슨 전화일까? 급한 일일까? 그렇진 않겠지.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 곁을 떠나 복도를 걸어갑니다. 천천히 사무실로부터 멀어집니다. 여전히 전화벨 소리는 텅 빈 복도에까지 흘러나와 울리고 있습니다.
그 전화를 받아야 했을까요? 저는 좀 더 충실해져야 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 죄를 고백해야만 할까요, 이제? 하지만 이해주어야 할 것은, 그곳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8층인가 9층에 위치해 있단 것입니다. 그 점을 꼭 포함시켜주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다 제 잘못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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