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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물고기통신 107 - 카프카를 새롭게 읽기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107 - 카프카를 새롭게 읽기

물고기군 2005. 12. 27. 14:31

한해가 또 가는군요. 물론 그렇죠. 언제부터인가, 한해가 간다는 것이, 또 한 살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안 그런 때도 있었겠죠. 다음 해 대학생이 된다든지, 제대를 한다든지, 복학을 한다든지. 아니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말이죠. 뭔가 기대할 것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거죠. 한편으로 사실은 ‘아직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마음이 불편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어떤 것을 원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자꾸 ‘그것’과 현재의 나 자신과 처지를 비교하니까 그런 거겠죠.

그것은 단순히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한 어떤 것은 아닐 겁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 이런 것들만은 아니겠죠. 물론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분명 ‘행복’을 가져다주고, 만일 그것들을 온전히 외면하고 도외시할 수 있다면, 단지 그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는 ‘다른 어떤 것’을 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내용이 다를 뿐, 형식은 같은 겁니다.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 한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정말로 어떤 무엇보다 더 가치 있는 것, 더 선한 것, 심지어 ‘삶 그 자체보다 더한 것’이 있다는 믿음은, 사실은 ‘삶 그 자체를 긍정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물론 이것이 간단히 치워버릴 수 있는 뻔한 속임수는 아닙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속인다는 겁니까?

가령 ‘살기위해서 자신의 이유를 잃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잃는 것보다 더 슬프다.’고 말하는 것은 적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음미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단지 ‘살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은 이런 때 ‘삶을 위한 것’ 편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반대편에 무엇이 있나요? 표현을 그대로 따라가자면 ‘자신의 이유’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보다 더한 것’입니다. 때로 이것은 단순하게 번역하자면,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의 것을 ‘존재’라고 부를 근거가 됩니다. 삶과 이유. 존재와 의미. (설득력이 있나요?)

과연 어떤 것이 더 추구할 만한 것일까요? 좋은 차입니까, 대의입니까? 좋은 직장입니까, 명예입니까?

물론 ‘존재’를 ‘삶’과 동일한 것으로 두는 것은 참 어리석은 생각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면에서 ‘살아있다고’ 꼭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다르게 표현하면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이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를 포기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존재는 ‘의미가 될 수 없는 어떤 것’, ‘의미보다 더 큰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표현에 불과합니다.

정작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표현이 맞냐 틀리냐가 아닙니다. 정말로 의심스러운 것은, 그러니까 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과연 우리가 둘 중의 하나라도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살기위해서 자신의 이유를 잃는 것은 자신의 삶을 잃는 것보다 슬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것도 잃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애초에 우리는 ‘삶’도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죠. 우리는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것을 ‘잃어버려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은 속임수지만, 그 속임수가 다른 하나를 가져다줍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를 잃는 척’하면서, 다른 하나를 얻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있던 나 자신을 만드는 겁니다. 하나의 ‘지난’ 과거로써, 또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써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했을 때, 오히려 예외적인 것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나이를 한 살 먹는다는 시답잖은 얘기가 괜히 심각해져 버렸네요. 최근에 ‘카프카’를 새롭게 읽고 있습니다. 위에 말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나이를 한 살 먹는다는 것’, ‘살아간다는 일’은 참 무서운 겁니다. 이 무서움은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된다든지, 가령 신춘문예에 등단을 한다든지, 유명한 소설가가 된다든지 하는 나의 꿈들이 이뤄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무서움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도 저를 괴롭히는 건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전부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반대로 ‘저 우주’, ‘머리 위에 반짝이는 별들’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옳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을 생각합니다. ‘저 사람들’ 말이죠.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만일 ‘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저는 결코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세요. 오랜 시간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세요. 그러면 그들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게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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