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훈련소 시절, 매일 아침 훈련병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합했습니다. 기상과 동시에, 이불을 개키고, 전투복을 입고, 전투모를 쓰고, 집합하기까지 약 10분 정도가 걸립니다. 기상나팔이 불고 10분 뒤에 전 연대원들은, 연병장에 집합을 완료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이 나옵니다. 국군도수체조 음악입니다. 연병장은 매우 넓었고, 그 안에 모인 연대원들 숫자는 약 천 명 가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그들 모두가 매일 아침 똑같은 동작을, 똑같은 음악에 맞춰 반복하는 겁니다.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 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수많은 인간들과 다르게 한 일이라곤,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멀리 떠 있는 새벽달을 바라보던 일이었습니다. 그건 후반기 훈련으로, 입대한지 비록 한 달 정..
헐떡고개를 오르다가, 어떤 플랜카드를 보았다. 부산 국제영화제 한국단편영화 최우수상 수상에 관한, '그림자 놀이'의 자축 플랜카드였다. 물론, 수상자는 단순히 '그림자 놀이'의 선배일 뿐이다. 그 선배일 뿐인 사람이,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닌, 동기형이다. 지각이었다. 한 시간쯤 늦으면, 항상 고민을 하게된다. 내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정했는데, 그것은 한 시간 반을 넘으면 들어가지 말고, 넘지 않으면 들어가자 라는 거다. 즉, 총 수업시간을 반으로 나눠서 기준을 삼은 셈이었다. 아침 아홉 시 수업은 1학년 때부터, 지금 4학년 때까지 항상 취약하다. 무려 7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그 취약함은 개선되질 않는다. 아마, 내 존재 자체가 그런 식으로 되어먹은 모양이다. 근데, 그 플랜카드를 보는 순간, 이..
틀림없다. 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차례를 기다리며 여러 변명을 궁리하는 어린애처럼. 하지만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주사는 맞아야 하고, 그것이 옳다. 난, 사회나 현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고, 커피 둘 설탕 둘의 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행복'이라고. 그래, 고등학교 시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마시는 맥주처럼. 이제 막 해가 져서 어둠은 새 것이고, 뛰어 놀던 아이들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믿지 못할 잔향으로 텅 빈 놀이터에 남아 있다. 수첩에는, 전화번호가 잔뜩 적혀 있고, 그래서 난 억지를 부려본다. 막 어두워지는 하늘 빛깔은, 옆은 파랑에서부터 보라빛까지, 땅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늘 천장까지..
나이가 들면, 사람이 꼭 현명해지는 건 아니더라도, 아는 건 많아지는 법이다. 적어도, 기억력만 좋다면 말이다. 가령, 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비둘기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몰랐다. 후배녀석은 나를 쳐다보더니, '비둘기 싫어하는 사람 많은데'라고 말한다. 하여간, 난 그 많은 사람들 중, 오늘 처음으로 한 명을 만나 본 셈이다. 귀뚜라미를 싫어하는 여자는 알고 있다. 왜 싫으냐는 질문에, 귀뚜라미는 특히 어디로 튈 지 모르기 때문에 더 무섭다는 대답이다. 아, 이 정도면 설득력있다. 어쩐지 인생의 진실이 들어있는 말 같다. 책상 앞에 써 붙여 놔도 손색이 없다. "귀뚜라미가 무서운 건, 그것이 어디로 튈 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왜 싫은데? '그 발이 싫어요, 그리고, 특히 퍼덕퍼덕 대는..
가끔, 내 자신에게, 재능이란 게 있는가 라고 묻게 된다. 정확하게 말해서, 가끔이 아니라, 자주 묻는다. 그러한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또 이러한 질문을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되는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문장을 쓰게 되는가? 분명한 건, 소설가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이다. 마치, 얼굴이 예쁜 여자애에게 '커서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말보다 누군가 타인의 말을 잘 듣는 아이에게 우린 이렇게 말해야 될 것이다. '넌 커서 소설가가 되면 되겠네.'라고. 타인의 말을 잘 듣는다는 건, 분명 재능이다. 아주 특별한,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 재능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어디 남의 말을 잘 들어주..
'삶은 가혹한 것이고, 적자만이 살아 남는다' 이 비슷한 말을, 고등학교 3학년, 책상 앞 벽면에 부쳐 놓았었다. 시험이 끝나고도 한동안 붙어있던 그 종이장을 무심코 떼었을 때, 벽면에 남아있던 하얀 빈자리를 난 기억한다. 그것은 내게, 어떤 종류의 숙명성을 떠올리게 했다. 이를테면, 그 불합리한 명암의 대비를 난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보편적이고 영원한 이 세계의 엄정한 운영체계 같은 것. '삶은 가혹한 것이고, 적자만이 살아남는다.' 간단하다. 열심히 살아라. 대체, 무슨 해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어떠한 시기가 되면, 난 옆친구에게 묻는다. 몇 시야? 친구는 죽은 시계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아직은 그 시간이 아니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와, 방문..
눈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눈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게 된다. 정작, 눈이 오는 날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코트를 목 끝까지 단추 채우고, 목에는 목도리까지 칭칭 감은 채, 눈이 많이 오던 밤에,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여자를 기다려 본 적이 있다. 신호가 바뀌고, 난 그녀를 마중하러, 중간까지 건너간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시 되돌아오자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내 머리 위에 묻 은 눈을 털어 준다. 그녀의 목소리. 거리는 한적하고, 우린 아직 갈 데를 정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귤이다. 그 해, 마루에 있던 귤박스는 나무 널빤지로 만들어진 박스였다. 손에 짚히는 만큼 몇 개의 귤을 꺼내, 쇼파에 앉아, 크리스마스 특집 프로그램을 본다. 빨간 복장의 산타클로스가..
해질녘에 열차를 탄다. 선배는 내게 서울이 싫다고 말했다. 책을 덮고, 바깥, 거리를 본다. 높은 빌딩 꼭대기에 조그만 빨간등이 반짝인다. 알아, 저건 하늘을 나는 것들이, 부딪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등이지. 하늘은 나는 것들은, 하지만, 더 높이 난다. 멀리, 도시의 끄트머리, 희미한 산등성이, 불그스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다. 항상 아름다운 것들은, 먼데 있다. 먼 산에 내리는 겨울눈을 본 적이 있다. 제대를 반년 남겨둔 겨울, 여자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고, 우두커니 난, 먼데만 바라봤다. 먼데 있는 것들은, 항상 아름답다. 난 말을 뒤집어 본다. 열차는 풍경들을 보여주기 위해, 속도를 줄인다. 고개를 돌려, 책을 펼친다. 언제부턴가, 하루는 내게 빚이었다. 넌 네 삶에 임대료를 지불해야돼. 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