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눈이 왔나봐. 어제 저녁무렵 창 밖을 내다봤을 땐 아스팔트가 까맣게 젖어있길래 비가 내렸나 싶었는데, 학교에 와보니 사람들 발 닿지 않는 곳에 하얗게 눈이 쌓였더라. 이상하지. 나이가 들 수록 사람은 냄새에 민감해지는 법인가봐. 눈냄새가 났어. 뭐랄까, 냄새란 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지만, 난 단박에 아, 눈냄새구나 라고 깨달았어. 항상 기억이란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일깨워지는 법이니까. 눈냄새를 기억하기 위해선, 직접 눈냄새를 맡아봐야 한다구. 참 오랫동안 너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구나. 솔직하게 고백하면 편지를 써야지 싶을 정도로 네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었던 탓이겠지. 오늘은, 무슨 까닭인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집을 나서 학교까지 오는 긴 시간동안 네 생각만 했지. 시험이어서 페이..
고등학교 때였던가? 같은 반에 남우라는 친구가 있었다. 성은 모른다. 그래도, 이름만은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다. 지독히도 말이 없던 친구였다. 얼마나 말이 없었냐면, 반에서 친구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아, 상상해보라. 고등학교 삼 년 내내 그에겐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여 걸었고,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재빨리 회피하던 친구였다. 왜 그랬을까? 뭐가,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체구는 자그만했고, 몇 번인가 뒷자리의 아이들에게 돌림빵을 당하곤 했었다. 또 왜 그랬을까? 왜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을까? 그래, 그 친구의 이름이 남우였다. 언젠가, 짓궂은 친구 하나가 칠판에 커다랗게 이렇게 썼다. 男雨=레인맨 그래서 기억하는 거다. 언젠가, 다시 모교를 찾아갔..
첫 눈이 왔다고 합니다. 그 날 저도 깨어 있었습니다. 새벽 한 시쯤에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는데, 글쎄요, 우리 동네엔 눈 같은 건 내리지 않더군요. 이건 첫눈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풍성하게 눈이 내린 시각은 새벽 세 시 네 시경이라고 하더군요. 뭐라도 좋은데, 왜 사람들이 첫 눈에 관한 얘기를 저한테 안 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첫눈 전령사? 뭐, 그런 직업이라도 있어서, 첫눈이 오는 날, 오는 시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을 때야, 아, 올 겨울 첫눈이 왔구나 라고 입을 모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자는, 종종 내 삐삐 인사말을 직접 바꿔주곤 했다. 분명 당시엔 그러한 일이 유행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비밀번호를 나누고, 인사말을 대신 녹음해주고, 가끔 상대방의 음성사서함도 조심스레 확인한다. 자신이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지 않나 라고 의심해서는 아니다. 그냥 서로의 가장 비밀스러운 개인정보까지 나누고 있다는, 소꿉장난 같은 친밀함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얼마간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여자에게 요구하고, 며칠 뒤, 내 삐삐 인사말은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난 여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는 일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난 그날의 ..
모든 일들이 그렇습니다. 마치 떠난 후에야 그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것처럼 우린 항상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후회합니다. 수많은 말이 있고, 수많은 비유가 있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 가장 적합한 말을 찾아보곤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또 실패합니다. 아, 세상에 적합한 말 따위는 없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오래도록 가슴을 문지르며, 왜 라고 묻는 질문은 어리석습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아파서, 그 일은 이미 일어났고, 흔한 비유처럼 아무도 시간을 돌릴 순 없습니다. 난, 이제 여기에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런 노래가 떠올랐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이게 동요였던가? 아무튼, 요즘의 내가 그런 기분일세. 어느 교수가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라는 질문을 칠판에 썼었지. 나 또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한동안 찾고 있었던 것 같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거기에 정답이 있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즐겁게 춤을 추는 수밖에. 왜 춤을 춰야 하는지? 이 즐거움이 어디서 오는지? 누구를 위해? 어떤 춤을?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보지만, 정작 난 춤을 추고 있지 않았던 걸세.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어찌 그 답을 알겠나? 내 말의 포인트는 이걸세. 언젠가 멈춰서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춤을 춰야 한다는 거라고. 멈..
'텅 빈'이란 표현을 쓰고 나면, 본능적으로 다시금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곤 했었다. 마치, '앵두 같은 입술'처럼 그건 이미 죽어버린 이미지가 아니던가. 이런 표현은 수 없이 많다. '파란 하늘', '날카로운 칼날'. '빛나는 보석' 등등. 하지만 가끔, '텅 빈'이란 표현을 다시 지우고 오랫동안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 자리에 어떤 다른 말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령, '텅 빈 복도' '텅 빈 복도'라는 말과, '텅 빈 복도'라는 이미지는 서로 딱 달라붙어서, 나로선 둘을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난,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런 '텅 빈 복도'를 만나곤 했었다. 제일 처음, 나의 '텅 빈 복도'의 이미지가, '텅 빈 복도'라는 말을 만나게 된 것은, 군에 있을 ..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닌다. 7년 동안이다. 7년 중, 3년은 군대에 있었으니, 실제로 내가 전철을 타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한 건 4년 정도다. 옥수역이란 데가 있다. 3호선과 국철이 만나는 환승역이다. 난 그곳에서 성북행 열차를 타고 회기역까지 간다. 성북행 열차는 일반 지하철과 달리, 열차와 열차의 시간간격이 20분 정도였다. 그러니까, 한 시간에 세 대 정도 밖에 오지 않는다. 또 다른 점은, 열차승강대가 바깥에 있다는 점이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열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앞으론 한강이 보인다. 지금에야, 강변도로가 생겨서 볼 게 없어졌지만, 군대를 가기 전만 해도 강과 시커먼 모래톱위로 찰랑거리는 물결을 볼 수 있었다. 열차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던 난 항상 그곳에서 오래 열차를 기다려야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