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알아, 행복이란 삶의 어느 특정한 시간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호의의 자세이다. 이것은 일종의 대안이다. 때론 자기자신을 속이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의 삶이 모두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면, 거기엔 항상 부조리 또는 불합리의 요소가 숨어있다. 즉, 삶이란 본래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행복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누구도 비도덕하지 않고, 다만 무도덕한 것처럼. 행복이란, 그리하여 상상력과 자기기만이 필요한 일종의 창조의 행위이다. 다만, 이러한 행위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행복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시도이다.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하고, 누구누구보다, 혹은 어떤 때보다 등등.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행복을 양자택일의 세계 속에 편입시켜야 한다..
세미나를 통해서 이미 했던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가 느끼는 감정, 또는 평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보편타당한 원칙 위에 근거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타당한 원칙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역시 문제는 나라는 한 개인(비록 엉성하지만 소설을 쓰려고 하는 소설 지망생)이 소설이나 소설의 문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고한 원칙이고, 그 원칙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가진 원칙은 불분명하고, 내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미색 붙박이장'에 대해, 여..
벌써 내일이 예정되었던 세미나다. 규열의 전화를 받았다. 일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것 같다는 말. 여전히, 작품은 나오지 않고. 모두들 바쁜가보다. 하긴 영어학원을 다니랴, 아르바이트를 하랴, 학원강사를 하랴. 바쁘지 않은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나만 여전히, 느즈막히 일어나 담배 한 대를 물고, 음악을 듣다가 답답하면 집밖을 나와 날씨를 살핀다. 멀리까지 걸어가 본다. 막 끓여낸 커피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TV를 보게 되었는데, 시간을 기다려서 보진 않더라도, 항상 재밌게 보던 만화가 하고 있었다. 만화제목은 모른다. 수달, 다람쥐, 너구리 등등, 동물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다. 주인공 격인 수달이 오늘도 '어째서' 병에 걸려 친구들에게 묻는다.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또, 며칠동안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냈다. 홈이 없는 스위치를 돌리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하루하루가 지났다. 몇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난, 수요일을 가장 좋아했다. 수요일엔 HR 시간이나 특별활동 시간이 있었고, 내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 다른 날에 비해 한 시간 일찍 모든 수업이 끝났다. 한 시간 일찍 집으로 돌아오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아 오늘은 수요일이고, 이제 목요일과 금요일만 지나면 주말이 돌아온다는 걸 알았다. 휴식이다. 얼마나 많은 수요일을, 또 얼마나 많은 수요일의 하교길을 걸었던가? 난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성장했다.아직도 난 그 하교길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교문을 나와서, 육교를 건너고, 아파트 단지의 ..
눈길을 걷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건 눈길을 걸어본 사람이 안다. 특히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포인트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없는 노릇이고, 단지 종래 양발에 실었던 신체의 하중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무게를 분산시키는 것을 뜻한다. 눈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게다가 몇 번이나 넘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러한 방법을 깨닫고 행하게 된다. 자, 이제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미끈거린다면 재빨리 다른 발로 무게를 옮길 수 있게 된다. 아주, 날렵하게 발을 놀리면서, 그러면서도 결코 허둥대거나 펄쩍 펄쩍 뛰어선 안 된다. 말 그대로, 사뿐사뿐 걸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포인트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마..
오후 네 시, 권호와 규열이를 보내고 나머지 시간 내내 TV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 중간에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월요일 날에 내려고 했던 레포트를 낼 필요가 없다고 전해주었다. 설마 재수강 시키겠냐, 라는 게 그 친구 말의 요지였다. 그래, 끝났다. 논문도 냈고, 마지막 시험도 치렀고, 더 이상 쓸 레포트도 없다. 대학생활이 끝난 것이다. 물론, 대학원에 진학했으므로, 별 다른 의미는 없다. 난 여전히 학교를 나가야 할 것이고, 앞으로 또 2년 어떻게 어떻게 꾸려질 것이다. 한없이 한심하고, 또 한없이 무가치한, 유보.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취하고, 기억도 하지 못할 말들을 배설처럼 쏟아내고, 또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분명 난 들떠 있었다. 다시 나한테 돌아오지 못할 말들을 지껄여댄 걸 보면. 선..
음. 언수형이 잠수를 탔단 말인가? 그런 일이, 그 말 많은 양반이 말없이 잠수를 타다니. 어이, 어디서 잠망경이라도 세우고 있으면 눈이라도 깜벅거려줘야지.아무튼, 이렇게 방안에 앉아 이 친구 저 친구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꽤 유쾌한 일인 것 같군. 역시 나도 이러쿵 저렁쿵 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내 자랑 같지만, 작년에 나도 민속학을 들었었는데 (물론 강사는 다른 사람이겠지만) A뿔다구를 받았다구. ^^;물망초라는 노래가 있어. 누가 불렀었지? 그런 노래들은 실제 가수가 불렀던 것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불렀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 기억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지만, 지금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1학년 여름 농활때가 떠오르는군..
이젠 다 잊어버렸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집 전화번호, 핸드폰 번호, 삐삐번호, 직장번호.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술만 마셨다 하면, 내 이름은 잊어버려도 그녀의 전화번호는 잊지 않았는데. 공중전화부스, 난 언제나 전화기에 머리를 기대고 전화했었지. 그 뒤 어느 날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모든 번호들이 문득 힘들어졌다. 문득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젠 다 잊어버렸다. 일 년 지났을 뿐인데, 잘 모르겠다. 그게 긴 시간인지, 아님 짧은 시간인지. 일 년 전 그 날, 이렇게 쉽게 보낼 수 있는 일 년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의연했을 텐데.돌아보면, 언제나 그림자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