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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열심히 살아라` 본문

단상

`열심히 살아라`

물고기군 1999. 10. 28. 03:46
   '삶은 가혹한 것이고, 적자만이 살아 남는다'
   이 비슷한 말을, 고등학교 3학년, 책상 앞 벽면에 부쳐 놓았었다. 시험이 끝나고도 한동안 붙어있던 그 종이장을 무심코 떼었을 때, 벽면에 남아있던 하얀 빈자리를 난 기억한다. 그것은 내게, 어떤 종류의 숙명성을 떠올리게 했다. 이를테면, 그 불합리한 명암의 대비를 난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보편적이고 영원한 이 세계의 엄정한 운영체계 같은 것.

   '삶은 가혹한 것이고, 적자만이 살아남는다.' 간단하다. 열심히 살아라. 대체, 무슨 해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어떠한 시기가 되면, 난 옆친구에게 묻는다. 몇 시야? 친구는 죽은 시계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아직은 그 시간이 아니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걸어잠그고, 다시 책상 앞에 서서, 아무 것도 씌어있지 않은 벽면, 하얀 종이를 본다.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담배를 문다.

   그건 누구도 아닌, 내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내 책상이고, 내 라디오고, 내 종이라고.

   워크맨의 정지버튼을 누른다. 학교 아침방송이 나오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항상 이 시간엔 아침방송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난, 오늘 처음으로 워크맨의 정지버튼을 눌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 아니다. 노래는 내가 모르는 곡이었다. 정문에서 약 50미터 정도는 쭉 뻗은 직선 길이다. 가운데 왕복 이차로의 차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 보도를 학생들이 걷는다. 차도 위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플랜카드가 가로 걸려 있다. 일정한 주기로 플랜카드는 바뀌는 것일 테지만, 내용은 대개 비슷하다. 학술대회 : 인문학의 전망, 축, 정경 92학번 CPA 합격 : 동문일동, 국가보안법 철폐 : 총학생회. 문구 중에 맞춤법이 틀린 '왠말이냐'가 나를 짜증나게 한다.
   학생들은 나를 지나쳐 간다. 어느 해 봄, 난 선배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운동권이고, 지난 가을 내 애인이었다. '선배, 끝난 거 아냐? 상황이 달라졌잖아.' '아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은행잎이 바람에 떨어지고 있다. 노란 은행잎은, 한사코, 공중을 휘돌고 있다. 은행잎은 가벼운 영혼처럼, 쉽게 땅으로 내리지 못한다.

  세상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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