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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모든 죽은 자는, 뒤에 하나의 다리를 남긴다. 삼 년 전,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있다. 방엔 팔을 얹을 수 있는 낮은 창문이 있었는데, 일요일마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오랫동안 그 창을 통해 하늘을 보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빛의 비행기들을 바라봤다. 그 도시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언제라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파란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를 볼 수 있다. 비행기를 볼 수 없는 날은, 흐린 날 뿐이었다. 비행기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다른 높이로 날고 있었다. 세 대의 비행기를 한꺼번에 본 적도 있었다. 천천히 날던 비행기, 너무 멀어서겠지만, 마치 정지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 조금씩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거나, 한 켠에서 다른 한 켠으로 ..
어느날, 여자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길에, 난 어떤 소설의 제목을 구상했다. 이렇다. [옛날 노래 나라] 좀 흥분했었나 보다. 여러 가지 것들을 연달아 생각했다. 인물은? 줄거리는? 결말은?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단지, 제목뿐이다. [옛날 노래 나라] 내용은 이렇다. 어딘가에 [옛날 노래 나라]가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옛날 노래만 듣고, 옛날 노래만 부른다. 옛날 노래 가수가 있고, 옛날 노래를 듣던 시절이 있다. 옛날 노래 같은 햇살이 쬐며, 옛날 노래 같은 바람이 분다. [옛날 노래 나라]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단지, 혼자 남은 방안에서 옛날 노래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날씨가 춥다. 창을 닫았는데도, 찬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감기에 걸려 녹차를 끓여 마시고 있다. 이승환의 ..
비가 내렸나 보다. 잠결에 비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종일 잠을 잤다. 일곱시에 맞춰 논 자명종에 일어나지 못한 날은, 오래 잠을 자게 된다. 하나가 포기되면, 전부가 포기 되는 것처럼.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게 되는데도,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않는다. 또, 그런 날은 아무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없는 날이다. 내가 없는 날이고, 내게 없는 날이다. 인생을 거꾸로 세보면, 그다지 아깝지 않다. 내게 그런 날은 정말 많다. 한 없이 게으르고, 나른한. [세친구]란 영화를 스물 일곱번이나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화를 떠올려보면, 알 것 같다. 영화의 장면 장면이 내 삶과 닮아 있구나. 형 방에 누워 있는 걸 좋아했다. 누우면 커다란 창이 보..
외로움이란 어떤 것일까? 난 한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 그런 이유로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 중 국민학교와 고등학교는 큰 길 너머에 있었고, 둘 다 육교를 이용해 길을 건어야 했다. 물론 다른 육교다. 국민학교 시절, 육교 위엔 참 많은 것들이 있었다. 두 손만 앞으로 내민채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있던 어린 거지의 신발 상표는 페가수스였었다. 그 안에 석고를 부어, 여러 형태의 인형을 만드는 노란 고무틀을 파는 장사꾼도 있었고, 분명 속임수였겠지만, 가장 긴 고무줄을 골라내면 필통이나 색연필 같은 것들을 상품으로 주던 야바위 꾼들은 가끔씩 모습을 보였다.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잊지 않고, 우리에게 주의를 주던 불량식품을 팔던 장사군도 있었다. 시큼한 맛을 내던 분홍색..
비가 내릴 때마다 오랫동안 되풀이했던 버릇이 하나 있다. 레코드 점에 들어가 새 테이프를 사서, 좌석버스를 탄다. 빠닥빠닥하는 비닐 껍질을 벗기고, 워크맨에 테이프를 집어넣는다. 속지를 본다. 가사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본다. 거리는 금새 어두워진다. 비가 오는 탓이다. 밤이 되지 않았는데도, 차들은 전조등을 밝히고 있다. 상점들도 불을 켠다. 불빛들은 차창면에 흔들린다. 난 몇 번이고 김이 서리 창을 닦는다. 거리는 똑같은 거리다. 난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거리가 내게 친숙했던 적은 없다. 난 항상 버스를 타고 거리를 본다. 거리는 기억처럼 흐릿하다. 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왜 그 사람들의 얼굴이 내 마음을 흔드는 건지 난 모른다. 왜 자꾸만 차창면이 흐려지..
친구의 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밤의 거리를 달린다.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된다. 이를테면,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이, 시간의 결을 뛰어넘어 현재에 달라붙는 듯한, 그래서 그 일련된 시간들이 한 개의 제목에 각각 다른 번호를 매긴 작품목록이 되는 듯한 기분이 된다. 작품제목은, [친구의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린다] 그렇다. 난 일 년 전의 여름을 떠올린다. 여름 장마가 막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를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단 며칠, 하늘은 가을처럼 맑고 구름은 풍성하다. 구름의 그 하얀빛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조명 같다. 거리에는 아직 비의 냄새가 남아 있다. 창문을 열고 한껏 공기를 폐에 담는다. 친구의 차를 타고, 옛날 노래를 들으며 아무리 달려도 더 가까워지지 않는 먼 구름..
한 때, 아니 내가 시를 포기하고 소설로 내 인생의 부저를 바꿨을 때 난 소설이 어떤 이야기의 양식이라고 생각했다. 난 신나게 사람들에게 얘기하기 시작했고, 몇 몇 사람들은 정말로 내 얘기를 흥미 있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 적어도 이야기라기보다 시와 가깝다는 것에 지금의 내 절망이 있다. 절망, 우리가 한 개의 문장을 컴퓨터 액정화면에 띄워 올릴 때, 그 문장이 자신이 생각했던 어떤 광휘를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참을 수 없으리 만치 진부하고 상투적인 어떤 것임을 보게될 때 , 밤을 꼬박 세우고도 원고지의 매수는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삭제된 문장들 덕에 매수가 줄었을 때, 문득, 어떠한 문장을 일순간 내게서 내 머리속에서 끄집어내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녀석이 말했다. 당연히 핑클이 낫지, 핑클은 넷이쟎아. 갑자기 왜 그 생각이 났을까? 지난 겨울의 얘기다. 이유는, 분명히 티브이를 통해 베이브 북스의 신곡을 듣고 있어서다. 베이브 북스는 다섯명이다. 아니, 여섯명인가? 하여간 핑클보다 더 많다. 그런데 가끔 아무 까닭없이 기억나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필시 너무 흔해서 진부해진 학술적인 고려에 의해서 추리하건대, 내 머리통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무의식의 기억들이다. 그 기억은 논리적이지 않고, 언어적으로 맺어져 있는데 그 방법은 압축이나 이동, 환유와 은유다. 그리하여 외부적인 자극이 그 복잡한 시스템의 한 끝의 버튼을 누르면 엉뚱한 박사의 아침식탁을 위한 발명품처럼 쇠공이 구르고, 성냥불이 점화되고, 화살이 날아가고, 실이 끊어지고 등등의 화려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