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비오는 날의 좌석버스 본문
비가 내릴 때마다 오랫동안 되풀이했던 버릇이 하나 있다. 레코드 점에 들어가 새 테이프를 사서, 좌석버스를 탄다. 빠닥빠닥하는 비닐 껍질을 벗기고, 워크맨에 테이프를 집어넣는다. 속지를 본다. 가사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본다. 거리는 금새 어두워진다. 비가 오는 탓이다. 밤이 되지 않았는데도, 차들은 전조등을 밝히고 있다. 상점들도 불을 켠다. 불빛들은 차창면에 흔들린다. 난 몇 번이고 김이 서리 창을 닦는다. 거리는 똑같은 거리다. 난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거리가 내게 친숙했던 적은 없다. 난 항상 버스를 타고 거리를 본다. 거리는 기억처럼 흐릿하다. 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왜 그 사람들의 얼굴이 내 마음을 흔드는 건지 난 모른다. 왜 자꾸만 차창면이 흐려지는지 난 모른다. 여자를 생각하면, 왜 항상 내 잘못만 떠오르는 건지 난 모른다.
비 냄새에 섞여 버스의 기름냄새를 맡는다. 가끔 무지개를 본다. 그것은 아주 작은 무지개였고, 자세히 살펴보면 일곱 색깔도 아니다. 가로등 불빛이 비에 젖은 창에 굴절되어 만드는 익숙한 광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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