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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어머니와 시장을 보러가서 평소에 사먹지 못하는 비싼 음료를 샀다. 카페라떼다. 일반 슈퍼에서 내 기억으로 천 원이 넘는 비싼 음료다. 작년 여름 누군가 내게 사 준, 사주면서 정말 맛있지 않냐고 했던 음료다. 맛있었는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너무 비싸서, 그 뒤로 몇 번인가 사먹으려고 했다가 포기했던 기억만 난다. 그것보다 오백원이 싼 네스카페만 마셨다. 지금 먹어보니 정말 맛있다. 오랫동안 문장을 쓰지 못했다. 전화벨 소리 이후, 지금껏. 쓰지 못한 게 아니라, 쓸 수가 없었다. 슬슬 문장을 풀어야 되는데, 이미 굳어버려서 풀리지 않을지 모른단 두려움이 든다. 춘섭형의 글을 아직 읽지 못했다. 고민. 읽고 나서 문장을 풀어볼까, 문장을 풀어보고 읽을까? 권호와 수경의 이름을 보는 순간..
놀라운 일이다. 형주와 누군지 알 수 없는 여배우라는 사람이 글을 남겼다. 비유하자면, 문리대 앞 벤치에 들렀다. 형주. 대체 어디서 컴퓨터에 접속한 걸까? 고향집에 컴퓨터가 있는걸까? 그리고, 여배우는 누굴까? 국문과 사람일까? 아님, 들녘 사람인데 그냥 이름을 밝히지 않는걸까? 아무튼 반갑고, 한편 감격스럽다. 방학이 되었다. 방학이 된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울증은 어디서 오는가? 이유는, 1학기 동안 난 뭘 했는가 라는 후회에서 비롯된다. - 이유는 무엇무엇에서 비롯된다, 라는 문장이 맞는걸까? 강박관념처럼, 주어와 동사를 맞추고 있다. 필시 내 자신의 문장을 믿을 수 없어져 버린 탓이다. 왜 이 지경이 된 걸까? 문장의 자기검열, 긴장감, 수사에 대한 지나..
내가 한 때 경도되었던 한 작가는 문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첨예해지려 하지 말 것, 최대한 솔직할 것' 내가 처음 위의 진술을 발견했을 때, 과연 문장이란 마땅히 저러해야 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난 위의 진술을 이해했고, 또 그렇게 실천하리라 맘먹었다. 아래 희준 선배의 글을 읽었다. 오랜만에 게시판에서 긴 문장을 보았다. 아마도 전화로 웹에 접속한 채로 쓴 것 같진 않다. 제대로 된 긴 문장을 쓰기 위해선 모름지기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내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난 친구와 경쟁하듯 글을 썼다. 그러니까 밤 열 두시에 전화를 해서 자, 이제부터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벽 여섯 시 쯤에 다시 전화를 해서 난 A4지로 네 장을 썼어, 넌 어때? 라고 했다. 그리고 매 ..
이병우 기타집에 '비오는 날에 산보'라는 게 있어. 음악적인 조예가 그렇게 깊지 않아서 그 곡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에코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나? 울림같은 거 있잖아. 어떤 기술적인 과정을 통해서 그런 음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대부분의 기타연주곡들이 그래. 그 중에서 '비오는 날에 산보'는 그 울림의 효과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정말 근사해. 어둡거나 추적추적하지 않아. 맑은 빗소리, 즐거운 산보, 평화로운 오후, 호감을 느끼는 여자친구와의 전화통화처럼 아주 잠깐이지만 행복하다고 느끼지.
비오는 날엔 버스를 타는 버릇이 있어. 언제부터였던가, 하긴 내가 일상적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던 때는 재수때였으니까 그 시절부터였을거야. 오후 5시까지의 학원수업이 끝나고, 낡고 좁은 목제책상에 앉아 성문종합영어 한 시간, 정석한 시간, 그리고 몇 가지의 문제지들을 풀다보면 10시가 되고 야간 자율학습도 끝나고 - 몇개피의 담배꽁초를 화장실 환풍구를 통해 버리고, 싸구려 자판기 커피도 한두잔 마셨지 -오래도록 바라보면 이유없이 서글퍼지는 매일같은 풍경, 하루의 끝에 복도를 빠져나가는 재수생들의 긴 행렬에 파묻혀 밖으로 나와섰지. 그날은 비가 내렸어. 봄비였지. 서늘한 바람이 옷속을 파고들고, 양팔을 비벼대며 아 춥구나 싶어도 정확하게 말하면 여름이 시작되기전 마지막 봄비였어. 버스정류장까지는 뛰어간다해도..
넌 대단한 걸 잃어버린 양 호들갑을 떨지만, 마치 세상 전부를 잃은 것처럼 말이야. 허나 네가 잃은 건 그녀가 네게 주었던 '다정함'일 뿐이야. 하나의 사랑도, 4월의 100퍼센트의 소녀도, fresh한 겐조 향수내음도, 자주 쓰다듬던 머리칼도,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도 아닌 여자의 친절한 배려, 다정함,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건 이미 사라졌어. 오래된 책에서 10년전의 나뭇잎 책갈피를 찾아내듯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괜찮아. 누구나 알겠지만 '다정함'에는 개성이 없지. 더 예쁜 다정함이 없듯이, 더 못난 다정함도 없고, 호감이 가는 다정함, 혹은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다정함도 없어. 다정함은 다정함일 뿐이라고. 물론 꼭 같진 않겠지만 그녀가 줬던 그만큼의 다정함은 언제든 구할 수 있을거야. ..
참 이상해. 어제 친구랑 술을 한 잔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항상 여자와 헤어질 때마다 그 친구랑 술을 마셨다는 걸 깨달았어. 어떤 느낌이었냐면 모든 일들이 그렇게 반복된다는 거야. 계절이 바뀔때마다, 똑같은 계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그냥 내가 조금씩 늙었을 뿐이고 나이가 몇 살 들었다는 차이외에는. 여자도 그래. 분명 다른 여자인데도 예전에 만났던 여자와 비슷한 느낌의 여자들이 있어.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예전의 여자를 생각하곤 했지. 왜 그럴까? 그렇게 모든게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산다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텐데. 사실은 내 자신이 단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지. 이 세상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게 사실이라면, 나로서는 멍청하게 헛딛으며 살아왔다는 거야. 우..
접속사적인 휴식이란 게 있어. '그러나',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등등의 휴식, 정확히 어떤 접속사인지 몰라도 지금의 내가 그런 것 같아. 너무 오랫동안 적당한 접속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지만. 오랫동안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는 게 뭔지 잊고 있었나봐. 매일같이 친구의 차를 타고 학교를 통학하다 친구가 이사를 가는 통에 최근 며칠동안 전철을 타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아, 그래 전철을 타고, 한시간이 넘도록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간다는 게 이런 것이었지 싶더라. 혹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머나먼 쏭바강'이란 SBS 월화 특별기획 드라마가 있었더랬지. 36부작이었던가, 하여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 화요일 9시에 정확히 시작하던 드라마였으니까 기간으로 치면 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