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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여자는, 종종 내 삐삐 인사말을 직접 바꿔주곤 했다. 분명 당시엔 그러한 일이 유행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비밀번호를 나누고, 인사말을 대신 녹음해주고, 가끔 상대방의 음성사서함도 조심스레 확인한다. 자신이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지 않나 라고 의심해서는 아니다. 그냥 서로의 가장 비밀스러운 개인정보까지 나누고 있다는, 소꿉장난 같은 친밀함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얼마간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여자에게 요구하고, 며칠 뒤, 내 삐삐 인사말은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난 여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는 일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커튼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난 그날의 ..
모든 일들이 그렇습니다. 마치 떠난 후에야 그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것처럼 우린 항상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후회합니다. 수많은 말이 있고, 수많은 비유가 있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 가장 적합한 말을 찾아보곤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난 또 실패합니다. 아, 세상에 적합한 말 따위는 없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오래도록 가슴을 문지르며, 왜 라고 묻는 질문은 어리석습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아파서, 그 일은 이미 일어났고, 흔한 비유처럼 아무도 시간을 돌릴 순 없습니다. 난, 이제 여기에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런 노래가 떠올랐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이게 동요였던가? 아무튼, 요즘의 내가 그런 기분일세. 어느 교수가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라는 질문을 칠판에 썼었지. 나 또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한동안 찾고 있었던 것 같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거기에 정답이 있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즐겁게 춤을 추는 수밖에. 왜 춤을 춰야 하는지? 이 즐거움이 어디서 오는지? 누구를 위해? 어떤 춤을?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보지만, 정작 난 춤을 추고 있지 않았던 걸세.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어찌 그 답을 알겠나? 내 말의 포인트는 이걸세. 언젠가 멈춰서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춤을 춰야 한다는 거라고. 멈..
'텅 빈'이란 표현을 쓰고 나면, 본능적으로 다시금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곤 했었다. 마치, '앵두 같은 입술'처럼 그건 이미 죽어버린 이미지가 아니던가. 이런 표현은 수 없이 많다. '파란 하늘', '날카로운 칼날'. '빛나는 보석' 등등. 하지만 가끔, '텅 빈'이란 표현을 다시 지우고 오랫동안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 자리에 어떤 다른 말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령, '텅 빈 복도' '텅 빈 복도'라는 말과, '텅 빈 복도'라는 이미지는 서로 딱 달라붙어서, 나로선 둘을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난,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런 '텅 빈 복도'를 만나곤 했었다. 제일 처음, 나의 '텅 빈 복도'의 이미지가, '텅 빈 복도'라는 말을 만나게 된 것은, 군에 있을 ..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닌다. 7년 동안이다. 7년 중, 3년은 군대에 있었으니, 실제로 내가 전철을 타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한 건 4년 정도다. 옥수역이란 데가 있다. 3호선과 국철이 만나는 환승역이다. 난 그곳에서 성북행 열차를 타고 회기역까지 간다. 성북행 열차는 일반 지하철과 달리, 열차와 열차의 시간간격이 20분 정도였다. 그러니까, 한 시간에 세 대 정도 밖에 오지 않는다. 또 다른 점은, 열차승강대가 바깥에 있다는 점이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열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앞으론 한강이 보인다. 지금에야, 강변도로가 생겨서 볼 게 없어졌지만, 군대를 가기 전만 해도 강과 시커먼 모래톱위로 찰랑거리는 물결을 볼 수 있었다. 열차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던 난 항상 그곳에서 오래 열차를 기다려야만 ..
훈련소 시절, 매일 아침 훈련병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합했습니다. 기상과 동시에, 이불을 개키고, 전투복을 입고, 전투모를 쓰고, 집합하기까지 약 10분 정도가 걸립니다. 기상나팔이 불고 10분 뒤에 전 연대원들은, 연병장에 집합을 완료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이 나옵니다. 국군도수체조 음악입니다. 연병장은 매우 넓었고, 그 안에 모인 연대원들 숫자는 약 천 명 가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그들 모두가 매일 아침 똑같은 동작을, 똑같은 음악에 맞춰 반복하는 겁니다.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 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수많은 인간들과 다르게 한 일이라곤,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멀리 떠 있는 새벽달을 바라보던 일이었습니다. 그건 후반기 훈련으로, 입대한지 비록 한 달 정..
헐떡고개를 오르다가, 어떤 플랜카드를 보았다. 부산 국제영화제 한국단편영화 최우수상 수상에 관한, '그림자 놀이'의 자축 플랜카드였다. 물론, 수상자는 단순히 '그림자 놀이'의 선배일 뿐이다. 그 선배일 뿐인 사람이,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닌, 동기형이다. 지각이었다. 한 시간쯤 늦으면, 항상 고민을 하게된다. 내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정했는데, 그것은 한 시간 반을 넘으면 들어가지 말고, 넘지 않으면 들어가자 라는 거다. 즉, 총 수업시간을 반으로 나눠서 기준을 삼은 셈이었다. 아침 아홉 시 수업은 1학년 때부터, 지금 4학년 때까지 항상 취약하다. 무려 7년 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그 취약함은 개선되질 않는다. 아마, 내 존재 자체가 그런 식으로 되어먹은 모양이다. 근데, 그 플랜카드를 보는 순간, 이..
틀림없다. 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차례를 기다리며 여러 변명을 궁리하는 어린애처럼. 하지만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주사는 맞아야 하고, 그것이 옳다. 난, 사회나 현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고, 커피 둘 설탕 둘의 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행복'이라고. 그래, 고등학교 시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마시는 맥주처럼. 이제 막 해가 져서 어둠은 새 것이고, 뛰어 놀던 아이들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믿지 못할 잔향으로 텅 빈 놀이터에 남아 있다. 수첩에는, 전화번호가 잔뜩 적혀 있고, 그래서 난 억지를 부려본다. 막 어두워지는 하늘 빛깔은, 옆은 파랑에서부터 보라빛까지, 땅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늘 천장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