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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삶은 가혹한 것이고, 적자만이 살아 남는다' 이 비슷한 말을, 고등학교 3학년, 책상 앞 벽면에 부쳐 놓았었다. 시험이 끝나고도 한동안 붙어있던 그 종이장을 무심코 떼었을 때, 벽면에 남아있던 하얀 빈자리를 난 기억한다. 그것은 내게, 어떤 종류의 숙명성을 떠올리게 했다. 이를테면, 그 불합리한 명암의 대비를 난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보편적이고 영원한 이 세계의 엄정한 운영체계 같은 것. '삶은 가혹한 것이고, 적자만이 살아남는다.' 간단하다. 열심히 살아라. 대체, 무슨 해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어떠한 시기가 되면, 난 옆친구에게 묻는다. 몇 시야? 친구는 죽은 시계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아직은 그 시간이 아니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와, 방문..
눈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눈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게 된다. 정작, 눈이 오는 날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코트를 목 끝까지 단추 채우고, 목에는 목도리까지 칭칭 감은 채, 눈이 많이 오던 밤에,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여자를 기다려 본 적이 있다. 신호가 바뀌고, 난 그녀를 마중하러, 중간까지 건너간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시 되돌아오자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서더니, 내 머리 위에 묻 은 눈을 털어 준다. 그녀의 목소리. 거리는 한적하고, 우린 아직 갈 데를 정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귤이다. 그 해, 마루에 있던 귤박스는 나무 널빤지로 만들어진 박스였다. 손에 짚히는 만큼 몇 개의 귤을 꺼내, 쇼파에 앉아, 크리스마스 특집 프로그램을 본다. 빨간 복장의 산타클로스가..
해질녘에 열차를 탄다. 선배는 내게 서울이 싫다고 말했다. 책을 덮고, 바깥, 거리를 본다. 높은 빌딩 꼭대기에 조그만 빨간등이 반짝인다. 알아, 저건 하늘을 나는 것들이, 부딪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등이지. 하늘은 나는 것들은, 하지만, 더 높이 난다. 멀리, 도시의 끄트머리, 희미한 산등성이, 불그스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다. 항상 아름다운 것들은, 먼데 있다. 먼 산에 내리는 겨울눈을 본 적이 있다. 제대를 반년 남겨둔 겨울, 여자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고, 우두커니 난, 먼데만 바라봤다. 먼데 있는 것들은, 항상 아름답다. 난 말을 뒤집어 본다. 열차는 풍경들을 보여주기 위해, 속도를 줄인다. 고개를 돌려, 책을 펼친다. 언제부턴가, 하루는 내게 빚이었다. 넌 네 삶에 임대료를 지불해야돼. 난 ..
모든 죽은 자는, 뒤에 하나의 다리를 남긴다. 삼 년 전,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있다. 방엔 팔을 얹을 수 있는 낮은 창문이 있었는데, 일요일마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오랫동안 그 창을 통해 하늘을 보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빛의 비행기들을 바라봤다. 그 도시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언제라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파란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를 볼 수 있다. 비행기를 볼 수 없는 날은, 흐린 날 뿐이었다. 비행기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다른 높이로 날고 있었다. 세 대의 비행기를 한꺼번에 본 적도 있었다. 천천히 날던 비행기, 너무 멀어서겠지만, 마치 정지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 조금씩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거나, 한 켠에서 다른 한 켠으로 ..
어느날, 여자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길에, 난 어떤 소설의 제목을 구상했다. 이렇다. [옛날 노래 나라] 좀 흥분했었나 보다. 여러 가지 것들을 연달아 생각했다. 인물은? 줄거리는? 결말은?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단지, 제목뿐이다. [옛날 노래 나라] 내용은 이렇다. 어딘가에 [옛날 노래 나라]가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옛날 노래만 듣고, 옛날 노래만 부른다. 옛날 노래 가수가 있고, 옛날 노래를 듣던 시절이 있다. 옛날 노래 같은 햇살이 쬐며, 옛날 노래 같은 바람이 분다. [옛날 노래 나라]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단지, 혼자 남은 방안에서 옛날 노래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날씨가 춥다. 창을 닫았는데도, 찬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감기에 걸려 녹차를 끓여 마시고 있다. 이승환의 ..
비가 내렸나 보다. 잠결에 비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종일 잠을 잤다. 일곱시에 맞춰 논 자명종에 일어나지 못한 날은, 오래 잠을 자게 된다. 하나가 포기되면, 전부가 포기 되는 것처럼.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게 되는데도,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않는다. 또, 그런 날은 아무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없는 날이다. 내가 없는 날이고, 내게 없는 날이다. 인생을 거꾸로 세보면, 그다지 아깝지 않다. 내게 그런 날은 정말 많다. 한 없이 게으르고, 나른한. [세친구]란 영화를 스물 일곱번이나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화를 떠올려보면, 알 것 같다. 영화의 장면 장면이 내 삶과 닮아 있구나. 형 방에 누워 있는 걸 좋아했다. 누우면 커다란 창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