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자,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은 아주 무겁고 두터워서, 내 손을 뒤편으로 날려버릴 것 같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손목에 힘을 주었다.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를 통과하자 지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가 금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겠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살고 있다. 잘못 살고 있다.
재밌지. 나란 인간은 말야, 항상 미리 준비해 놓는 단 말야. 지금 이곳이 싫다고, 뛰쳐나가고 싶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떠나버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러면 어디로 가지, 머리 속으로 궁리한단 말이야. 그런 건 도망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냥 이동일 뿐이야. 도망치고 싶어서, 하루 종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열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다니. 남은 통장의 돈을 세고 있다니. 카드로 빌릴 수 있는 한도액을 합쳐보고 있다니. 그만두자.
나른한 오후, 그러니까 두 시나 세 시쯤, 한가로운 사무실에서 라디오를 듣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인생이 한없이 나른해지고, 이런 게 어쩌면 행복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를 기대한다.
철학자의 자살은 나를 생각하게 한다. 거기에는 아주 잠시라해도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있다고 느낀다. 그건 아마, 내가 철학이라는 것도 자살이라는 것도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살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죽음이라는 문제 또한 그렇다. 나는 여자에게, 아마 인간이란 결국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걸 꺼야, 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란 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유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 인간 보편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의 문제일지 모른다. 보편으로써의 존재란 무엇인가? 만일 존재라는 것이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다면, 개체로써 표현되는 존재, 즉 주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철학이란 결국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작업일 거라고 짐작해본다. 만일 ..
근사한 말을 알고 있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고, 싸워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세상은, 오직 싸워볼 만한 가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가지는, 일종의 무력감이나 절망감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차라리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감정은, 희망이거나 즐거움이다. 이 싸움에는 명분도 적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해진' 명분도 적도 없다. 싸움이라는 형식이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지극히 편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펀치를 날리는 쉐도우 트레이닝처럼 우리는 가상의 적과, 나중에는 분명 잊어버리게 될 사소한 명분을 위해 싸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킨 것에 지나지..
누구나 스물 아홉 살이 된다. 스물 아홉 살이 된다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더더군다나 자신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스물 아홉 살이 아니라, 스물 살, 열 다섯살이라해서 더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 별 소용도 될 것 같지 않은 세상의 기억을 조금 더 가지게 될 뿐이다. 강이 더 먼 곳까지 흐른다해서 언제나 바다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내 소설 {리와인드}를 다시 읽다. 작가 또한, 독자라면, 게다가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간파하고 있는 독자라면, 자신의 작품을 읽고 재밌다고 느끼는 건 계속 작품을 쓰도록 만드는 힘이 아닐까? 재밌다. 문득 {리와인드}를 좀 더 짧게 줄여볼까 생각한다. 문장도 좀 고치고, 그러면 좀 볼만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