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비닐에 덮인 소파, 거실을 가득 메운 오전의 하얀 햇살, 햇살 속을 고요하게 떠다니는 먼지, 담배 한 대, 맨 발, 액자가 떼어진 텅 빈 벽의 얼룩들, 그 자리에 대체 뭐가 걸려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빈자리들, 기억, 고통.
나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 때면, 악보를 잘 읽을 줄 몰라서, 미리 음계를 직접 행간에 적어두곤 했다. 한 칸 한 칸 손으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꼽으면서 꽤 긴 노래 전부의 음계를 기입하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곧잘 음악선생은 무작위로 학생을 일으켜 세워서 음계로 노래를 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고등학교 시절 내가 아는 녀석은 락 매니아여서 락커들의 이름을 줄줄 꾀고, 그 가사까지 다 해석해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클래식이든, 재즈든, 어느 것에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음악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 술이라도 잔뜩 마시고 ..
난 자주 나에게 어떤 시간들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는 법.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어떤' 시간이다.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차를 몰고 새벽의 거리를 달린다. 여자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약 이십 분 정도 걸렸다. 난, 차를 파킹시키고, 시동을 끈다. 시간은 일정해서, 언제나 열 두시 이십 분에서, 사십 분 사이 정도. 난 혼자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조금 더 듣는다. 이전에는 없던 버릇이다. 난, 라디오를 즐겨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디오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사연을 읽어주기도 하고, 직접 청취자와 전화통화를 하기도 한다. 패널이 나와서, 진행자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오면서, 그녀 생각이 났다. 갑자기, 그 라디오 ..
요근래 자주 나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나쁜 꿈이었다는 느낌만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오랫동안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머리가 이상하다. 두통과는 다르다. 아프지 않다. 조이는 것 같고, 잡아당기는 것도 같다. 자는 동안 누군가 내 머리를 두고 심한 장난을 친 것 같다. 수학여행이나 단체로 떠나는 여행에서 자는 동안 친구들이 벌이는 장난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지금껏 삶을 긍정하면서 살아왔다고 믿었다. 고민에 빠져있는 친구에게는, 너는 엄살을 떨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자기 합리화이거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점이니 입장이니, 하는 말..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 데, 화를 낼 만한 사람이 없다. 아무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이해할 것이다. 각자 살아가는 거다. 결국 잘못은 항상 내가 저지른다.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야간 화물트럭 운전사가 되고 싶다. 물론,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실제로 야간 화물트럭 운전사는,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나는 밤새 달려서 꼭 가야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가야만 하는 곳이다. 가보았댔자, 그저 화물을 내려주고, 혼자서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되돌아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람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야만 했었고, 갔다.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내가 가야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모도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분명, 일본말일텐데, 우리나라말로 바꿔보면, '똑바로', '반듯이', '일렬로'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말을 운전을 배우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차를 몰고 다녔고, 운전병 출신인 친구 녀석이 내게 '운전을 잘하려면 모도시를 잘 해야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모도시는 앞바퀴를 '똑바로', '반듯이', '일렬로' 되돌려 놓는 것을 말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면허시험 코스에도 있는, T자 코스, 후진 주차의 경우에 모도시가 쓰인다. 차를 멈춘 상태에서 운전대를 한방향으로 잔뜩 꺾어 후진으로 ㄱ자 형태로 코스에 들어가게 되는데, 뒤바퀴가 들어가는 방향과 일렬이 되면 앞 바퀴도 따라 일렬로 맞춰주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차는 후진으로 ..
수업시간에 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런 노래가 떠올랐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이게 동요였던가? 아무튼, 요즘의 내가 그런 기분일세. 어느 교수가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라는 질문을 칠판에 썼었지. 나 또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한동안 찾고 있었던 것 같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거기에 정답이 있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즐겁게 춤을 추는 수밖에. 왜 춤을 춰야 하는지? 이 즐거움이 어디서 오는지? 누구를 위해? 어떤 춤을?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보지만, 정작 난 춤을 추고 있지 않았던 걸세.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어찌 그 답을 알겠나? 내 말의 포인트는 이걸세. 언젠가 멈춰서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춤을 춰야 한다는 거라고. 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