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비디오로 본 영화다. 어째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아, 예전에 동네친구였던 녀석이 내게 권해준 영화다. 그 친구는 1년 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나와는 모든 게 다른 녀석이었다. 끔찍하게 성실하고, 속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한없이 단순하고 태평한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었다. 술도 안 한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가끔 내가 많이 손해본 느낌이 드는데, 단 한번도 속얘기를 서로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친구란 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모든 걸 망친다. 아무튼 그렇게 정반대였던 친구가, 재밌다며 보라던 영화였다. 아마 '너라면 재밌어야 할 영화야'라..
가끔씩 이럴 때가 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다른 것들과 별도로 따로 챙겨두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것만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 인생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청소를 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안쪽에 달라붙어 있던 곰팡이를 비누를 묻혀 깨끗이 닦아냈다. 재떨이도 물로 씻어냈다. 걸레로 바닥의 먼지를 훔쳤다. 침대 시트도 걷어서, 옥상에 올라가 먼지를 털었다. 일찌감치 서둘러서, 햇볕이 있을 때 일광도 시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방안이 아주 깨끗해졌다. 정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지만, 자동차를 예로 들면, 처음 바퀴를 굴리는 데에는, 바퀴가 구르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보다 더욱 많은 힘을 필요로 한다. 한번 구르게 되면,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최초의 한바퀴를 돌리는 데 드는 힘보다 훨씬 적은 힘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멈추게 하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른데, 가령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을 제로로 만듦으로써, 단지 엑셀에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노면과 바퀴와의 마찰력이나 대기중의 공기의 저항이라든지 하는 요소들이 개입되지만, 그래서 그것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그러한 힘들을 거스르는 노력을 뜻하겠지만, 어쨌거나 차를 멈추게 하는 것은, 출발시키거나 지속시키는 것보다, 간단한 일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것이 ..
후배에게, "내게는 내 인생이 있다." 이런 식으로 살아보라고 충고했다.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던가. "나에게는 나의 인생이 있다." 위안이 되는 말이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아무튼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잘 돼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니 제발 입닥치라고요.
어깨가 결린다. 평생 어깨 같은 건 결려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처음 경험하는 통증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직 느껴보지 못한 통증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완성된 소설을 수정하는 작업을, 나는, 즐거운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불완전했던 부분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면서, 완전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는 성과가 있지만, 애초에 도저히 수정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어떻게 손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런 건 어쩔 수 없다. 다음 소설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빨을 꽉 깨물고, 반성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전혀 고통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은 심하다. 이건 수정이 아니라, 개정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서 어깨가 결린다. 다 내..
어쨌건간에, 문장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문장은 단순한 기호가 이니다. 문장 바깥에서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