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백민석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문득 그의 소설 중의 한 장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여졌는지 궁금했다. 여전히 솜씨 좋게 얽어놓은 문장들이었다. 그에게는 확실히 재간이나 솜씨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다. 탁월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디다 자랑해도 좋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매력적이지는 않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그 문장들을 솜씨 좋게 잘 다루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은 잘 다듬어서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 집어넣어 그 맛을 충분히 살려내야 할 무슨 재료 같은 게 아니다. 좋은 문장이란, 소설 속에 쓰여진 문장이 아니라, 소설 속에 쓰여지지 않은 문장이다.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다.
편의점에서 담배 세 갑과 1.5리터 짜리 다이어트 콜라 페트 병을 샀다. 오천 사백 원이 나왔다. 냉동실의 얼음판을 꺼내 안에 있는 얼음을 빼내고 새물을 채워서 도로 넣었다. 집 안에 있는 컵 중 가장 큰 컵을 꺼내 얼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콜라를 붓는다. 급하게 부은 탓인지 거품이 많이 올라서 잠시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콜라와 얼음으로 가득 찬 컵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마루의 불을 끄고, 방안의 불도 끈다. 시디 플레이어에 김건모 5집 시디를 집어넣었다. 지금은 세 번째 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 김건모 5집이다. 언제 노래였지. 1998년 여름이다. 그 해 여름 나는 장지동의 운전면허 학원을 다녔다. 집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오고 가는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녔..
청소를 하는 중이다. 이제 방 청소는 마치 연례행사와도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계절별이든, 분기별이든, 일 년에 네 번 정도는 밤을 새워 방을 청소한다. 그만큼, 청소할 거리가 있다.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체계도 생겨서, 맨 먼저 하는 일은 옷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순서대로, '책정리', '프린트물 정리'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매번 달라지는데, 이번 청소의 테마는 아무렇게 치워놓았던 옛날 컴퓨터와 그 관련부품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참고삼아 얘기하면 전번 청소의 테마는, '책상서랍정리'였다. 그래서 아직 책상 서랍은 양호한 편이다. 프린트물을 정리하면 지난 번 청소를 언제 했는지 알 수 있게 되는데, 가장 지난 프린트물이 들녘 창작집과 관련된 걸 보니, 3월 말 경이 아니었나 싶..
구제불능이란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hopeless 라고 하더군. 다시 번역하면, '희망없는'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희망이라는 것이, '구제'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을까? 나도 물론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나를 '희망'없는 놈 쯤으로 여기는지도 모르지. 말 그대로, '구제불능'이라고 말이야. 많은 시간이 흘렀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그리고 또 대만에서는, 약 한 시간 정도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한국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열 여섯시간 정도. 대만에서 다시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후배의 창가자리를 뺐었다. 대만에서 한국까지, 두 시간 내내 나는 창 밖을 보면서 왔다. 기내음악으로 한국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 년도 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던 노래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개의 노래들은 내가 아는 것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구름은 멋지다. 더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짙은 청색의 바다 위로 구름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기는 다시 파리다. 오후 1시쯤에 도착해서, 같이 온 일행과 간단하게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형네 집으로 와서 씻고 밥 먹고, 메일을 확인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게시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시간쯤 산책을 했다. 날씨는 뜻밖으로 쌀쌀해서 거리에서 반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마치 가을 날씨 같았다. 벤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너무 멀리까지 걸어 나온 것 같아 되돌아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다지 멀리까지 걸어 나오지 못했다. 다시 밥 먹고 읽을 책이 없어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다. 3년 전에 역시 파리의 형네 집에서 읽었던 것인데, 처음 보는 책 같았다. 형이 방에 들어가고 이번에는 찬찬히 게시판의 글들을 읽었다. 생각보다 내가 알..
도시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거지가 있다. 젊은이들, 늙은이들, 경찰들, 범죄자들, 연인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 다, 우울한 풍경이다. - 마드리드
파리다. 이상한 일이다. 파리에서는 파리 냄새가 난다. 항상 기억이란 것은, 그것이 감각적으로 반복되었을 때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