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환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환상 이외의 달리 무엇과 싸워야만 한단 말인가?
고등학교 때 쓰던 연습장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는데, 그게 어디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 문장을 반복해서 쓰던 연습장이었다. 그리고 그 여백에, 그 뒷장에 문장을 적었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 때에도 나는 내가 뭐라 이름 붙일만한 것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같기도 하고, 그냥 짧은 단상같기도 하고, 일기같기도 했다. 때로 편지이기도 했다. 아니면, 언제나 완성되지 못한 소설의 서두였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틈나는 대로 그것을 적었고, 연습장을 다 쓰고 나서도 버리지 않았다. 그 중 몇 개의 것들은 서클의 시화전에 출품하기도 하고, 또 몇 개의 것들은 고등학교 교지에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실었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로 시도 되었다가, 수필도 되었..
봤어? 날씨가 구질구질해. 잊어버려. 내가 잘못한 거지? 그 말은 네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
계절이 바뀌는 것은 멋지다. 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조금 바깥으로 내밀어본다. 햇빛은 눈이 부시고, 나뭇잎은 짙은 초록빛깔을 띠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인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반팔이거나 민소매 차림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진뜩한 땀을 손바닥으로 훔친다. 나는 내가 중학교 시절 보았던, '라밤바'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항상 여름이면 그 영화를 떠올린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 그 영화를 떠올린 건 여름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마 파랑이거나 초록인 세로 줄무늬 반팔 티를 입고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다. 극장은 충무로의 대한 극장이다. 친구와 나는 동작역에서 전철을 타서 충무로역에서 내렸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그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해 두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한..
책장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꽤 눈부신 햇빛이었다. 열차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나는 잠깐 바깥을 내다본다. 벌써 여름이 온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다시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내리다가, 열차가 달리는 철로와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사이, 다리의 틈으로 강물을 본다. 강물 위에도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씩 출렁거리는 강물은 녹색 빛이다. 바다가 푸른 것은 하늘 빛 때문이라고 한다.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동해가 더 푸르른 것은 염분 때문이라고 한다. 강물이 녹색인 이유는 알 수 없다. 물 속에 녹색 부유물 같은 게 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득 물 비린내를 맡았다고 느낀다. 실제로 맡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열차가 완전히 밀봉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바깥의 냄새가 열차 안에까지 들어올 ..
과거를 생각하며 현재를 허비하는 따위의 짓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올바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누가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혹 올바른 삶이 존재한다 해도,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희망은 편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근거 따위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이 없다.
어머니는 아이의 조그만 손에 5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 요 앞 슈퍼에 가서 네가 먹고 싶은 걸 사먹으렴." 아이는 뛰었다. 그리 멀지 않은 슈퍼에 도착했을 때, 어찌나 꼭 쥐고 있었던지 동전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포장지가 예쁜 과자 한 상자를 골라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말 없이 동전을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얘야, 이 돈으로는 이것을 살 수 없단다. 다른 걸 골라오렴." 아줌마는 친절하게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분명히 네가 먹고 싶은 걸 사먹으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틀렸을 리가 없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도 아줌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