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1. '사라졌다.'· '잃었다.'· '떠났다.''사라졌다.'는 진술은 '잃었다.' 또는 '떠났다.'라는 진술과 다르다. 그 다름은, 상당히 직관적이지만, 곰곰 따져보면 어떠한 대상이 '없어졌다.'는 결과는 똑같다. 그러니까,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은 사라졌다. 어쩌면 지갑이 나를 떠났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라는 존재, 또는 나라는 존재를 포함하고 상황에서 지갑은 '없어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위의 세가지 진술은 어떻게 다른 걸까? 내 설명은 이렇다. 일단 '떠났다.'는 그 대상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갑이 '떠났다'라고 표현하는 건, 단순한 의인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잃었다.'는 대상을 향한 주체와의 관계, 어떤 면에서는 '소유'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즉, '잃었다.'는 ..
얼큰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있다. '2차 안가요?' 여자의 목소리다. 2차? 2차는 좋다. 누구라도, 2차는 좋다. 나는 동화가 좋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가 행복했다. 이런 얘기가 좋다. 물론, 좋아한다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다른 얘기겠지만.
사랑이란, (물론 이렇게 시작하는 모든 문장들에 대해 내가 가지는 거북함이란 일반적인 것이겠지만) 나에게 하나의 풍경이다.
요즘의 나는 분명, '이런 얘기를 쓰고 싶다'라고 생각하기 보다, '이런 얘기를 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삶이란 살면 살수록 더 어려운 법이다. 아니지. 이런 얘기가 아니다. 과연 '쓸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면 쓸수록 드는 생각인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이제 이만큼 써봤으니 쓰면 잘 써야지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내 자신의 소설에 대한 어쭙잖은 기대치가 생긴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잘 쓴 소설'이 뭔지나 알고 있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것은 굉장히 미묘한 문제다. 나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잘 쓴 소설을 만들려고 하지말고,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잘 말하라고. 그것이 소설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차후의 문제라고. 하지만 말하고 싶은 것을 잘 말했다고..
만일 삶이란 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소설 쓰는 삶을 선택하겠다.
차창문을 열고 초여름밤의 뻥 뚫린 대로를 달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는 거야. 만일 갈 때만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이 시간이나 세계에 대해, 또는 나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은 없는 거지. 지독한 시간들은 무시하고 좋은 시간에 집중할 것. 지독한 - 시간들은 - 무시하고 - 좋은 시간에 - 집중할 것. (Ignore the awful times,and concentrate on the good ones! )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차창문을 열고 초여름밤의 뻥 뚫린 대로를 달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는 거야. 만일 갈 때만 있다면 말이야. 이 시간이나 세계에 대해, 또는 나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은 없는 거지. 지독한 시간들은 무시하고 좋은 시간에 집중할 것. 지독한 - 시간들은 - 무시하고 - 좋은 시간에 - 집중할 것. (Ignore the awful times,and concentrate on the good ones! ) 이게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