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손보미 `지하철` - '나'는 남았다 본문
1. '사라졌다.'· '잃었다.'· '떠났다.'
'사라졌다.'는 진술은 '잃었다.' 또는 '떠났다.'라는 진술과 다르다. 그 다름은, 상당히 직관적이지만, 곰곰 따져보면 어떠한 대상이 '없어졌다.'는 결과는 똑같다.
그러니까,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은 사라졌다. 어쩌면 지갑이 나를 떠났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라는 존재, 또는 나라는 존재를 포함하고 상황에서 지갑은 '없어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위의 세가지 진술은 어떻게 다른 걸까?
내 설명은 이렇다.
일단 '떠났다.'는 그 대상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갑이 '떠났다'라고 표현하는 건, 단순한 의인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잃었다.'는 대상을 향한 주체와의 관계, 어떤 면에서는 '소유'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즉, '잃었다.'는 진술은 원래는 그것이 내 것이어야만 성립된다. 아니면, 적어도 나라는 존재 속에 포함된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떠났다.'는 그 대상이 주어, '잃었다.'는 그 주체가 주어가 된다.
그렇다면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잃었다.'는 주체의 입장, '떠났다.'는 대상의 입장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그 두 가지 표현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사라졌다.'는 그러한 관계가 없다.
동네 놀이터의 입구에 있던 '쓰레기통'이 어느 날 없어졌을 때, 그것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그것이 떠났다 또는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방에 있는 '쓰레기통'이 없어졌을 때, 쓰레기통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나는 쓰레기통을 잃어버린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사라진 것이다. 사라짐에는 질문이 없다. 왜 사라졌지? 사라졌다는 엄연한 사실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해가 지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런, 물리학적인 현상 같은 것이다.
2. 그들은 사라졌다.
[처음, 네 번째 애인이었던 그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여섯 살 때 집을 나간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집을 나갔고, 아버지와 별거를 했고, 이혼을 했다. 마치 마술처럼. 상자 속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그런 마술 말이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머니가 사라졌어요. 아버지는 내게 어머니를 찾지 말라고 말했어요. 어린 나에게 부모님의 이혼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엄마를 떠올린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지하철'의 스물 네 살 먹은 여자아이, 주인공 '나'에게 어머니는 사라진 존재다. 사라진 대상은 또 있다. 그녀의 네 번째 애인도 사라졌다. 강조하자면, 그들이 그녀를 떠났거나, 그녀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마치 한 달에 한번, 여자애들이 생리하듯이 일 주일간 지하철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녀석'처럼 그들은 그녀의 삶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존재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을 통고 받았을 때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아요, 전 괜찮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대상을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주체다.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주인공 '나'의 문제다. 그것은 사후에 일어나는 가치판단의 문제다. 자, 그들은 사라졌어, 그들은 사라진 것일 뿐이지. 애초부터 그들은 내게 포함된 존재가 아니고, 이후에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왜 그녀는 그들을 '사라졌다.'고 말하는가?
왜냐면 그녀는 남았기 때문이다. 남았기 때문에, 그래서 남은 삶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에게 '사라진 존재'여야만 한다. 그들은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의 삶과 무관한 '사라짐'의 방식으로 사라져야 한다.
3. 그들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 사라짐의 방식
["만나러 가는 도중에 중간에 내려버렸어.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쓸쓸해져서 그랬다. 칸마다 차곡차곡 몸을 접고 있다는 게 견딜 수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다 알고 있는 걸까."]
어떠한 대상이 사라지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주체와 대상이 거리적으로 멀어지는 방식, 둘째, 주체와 대상이 속한 공간이 갈라져서 나뉘어지는 방식.
예를 들어보자.
여자와 나는 같은 전철의 같은 칸에 타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의견 대립이 생긴다. 여자는 화를 내고 다른 칸으로 옮겨간다. 그녀는 사라진다. 아니면, 나는 3호선을 타고 수서역까지 가야 한다. 여자는 교대역에서 내린다. 여자는 내리고, 나는 그 전철을 타고 계속 간다. 창문으로 그녀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자는 가만히 있는데, 전철이, 그리고 전철을 타고 있는 내가 이동한다. 그녀는 사라진다.
첫 번째의 경우는, 거리가 문제가 되고, 두 번째의 경우는 공간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 그 두 개의 공간은 서로 넘나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라짐이 단순히 거리의 문제인 경우 대상이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이 문제인 경우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라짐의 예는 죽음이다. 그 두 개의 공간은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계열인 셈이다. 삶의 계열에서, 죽음의 계열로 옮겨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라진 존재들은, 다시 그녀에게 나타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계열로 옮겨간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이란 지하철의 정해진 노선과 같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렇다면 묵묵히 전철에 몸을 내맡기고 그 흔들림과 침묵과 어둠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려버렸다. 그들은 사라졌다. 그녀가 그들에 대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흘러간다고, 나는 조금 화가 났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사람에게 하는 변명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걸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말이다. 사람들은 그저 전철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러면 전철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에 그들은 정확하게 내려주는 것이다. 그도 내가 기다리는 이 곳에 정확히 내렸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 문득, 나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거냐고, 어머니나 사라진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왜냐면 아무리 그들이 사라진 것이라고, 사라진 것뿐이라고 말한다해도 '그들'의 사라짐은 남은 그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은 그녀에게도 삶은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의 '사라짐' 또한 삶의 일부로써 견뎌내야 한다.
아무도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삶은 주어지는 것이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견뎌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쉽게 아무 역에나 내려 도망쳐선 안 된다. 그들은 무책임하다.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4. 나는 남았다.
[주머니 안에는 지하철 표와 낡은 노선표가 들어있었다. 나는 노선표를 꺼내보았다. 나는 검지 손톱으로 '수서역' 주위에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원 표시가 사라질 때쯤, 다시 손톱으로 원을 그리기를 반복했다. 도착역이 반쯤 남았을 때, 나는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전철에서 내려버렸다. 나는 씩씩하게 승강장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개찰구에 표를 밀어 넣고 이곳을 나가보자.]
모든 일탈은 헤프닝에 불과하다. 삶은 일탈까지도 자신의 영역에 포함시켜버린다. 어떠한 저항도 결국에는 상품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광고의 헤드카피를 보라!) 두려운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액션이 일탈이라든지, 저항이라든지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그것은 재빠르게 기호화된다.
'그 녀석'은 어느 날 낡은 노선표를 버리고 사라진다. '그 녀석'이 버리고 간 노선표를 그녀는 집어든다. '그 녀석'은 단지 하나의 기호였을 뿐이다. 열 평짜리 좁은 매표소에서 기계적으로 매일 같이 표를 파는 역무원들에게 '그 녀석'은 단지 하나의 얘깃거리일 뿐이다. '그 녀석'이 어디로 가는지, '그 녀석'은 어느 역에서 내리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 '그 녀석' 말이야."
그는 내 얼굴을 조금 바라보다가, '아,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이라고 말했다.
" '그 녀석', 이제는 무임승차하지 않아. 애오개 행 표 한 장 주세요, 라고 얘길 하는 거야.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 녀석'은 행복할까, 라고 물어보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제, '그 녀석'은 행복할까? 사라진 그는 행복할까? 엄마는 행복할까? 묻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사라진 것은 단지 우리의 눈앞일 뿐이다. 사라져봤자 그들은 어딘가 그녀가 모르는 역에서 낡은 노선표를 꺼내들고 무슨무슨행 열차표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곳을 나가봤자, 저곳은 없다.
[개찰구까지 단숨에 걸어가서 표를 집어넣으려던 나는 그만 내 모든 동작들을 멈춰 버렸다.]
그녀는 남았다. 남고 싶어서 남은 것이 아니라,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았다. 그녀는 아무역이나 내려 개찰구에 표를 밀어넣고 나간다해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막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녹음된 여자의 목소리'를 그녀는 듣는다. 그녀는 다시 승강대로 내려갈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그녀는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쉽게, 너무도 무책임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s : 이 '사라짐'의 테마는, 손보미의 다른 작품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조금만 힘들어지면 편해질 수 있다]에서는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새로 사귄 애인'이 사라진다. [아침식사]에서는 '오빠'가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어느 것이나, '죽음'이거나 아니면 '죽음과도 흡사한 다른 계열로의 이동'이다. 그리고 언제나 여자는 남는다. 즉, 이 모든 작품들의 주인공은 '남은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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