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무라카미 류, "69" 본문
* 무라카미 류, [69], 양억관옮김, (예문, 1996)
읽으면서 내내,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꽤나 열심히 읽던 학원소설이나, 하이틴 로맨스가 생각났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라면 알겠지만, 학원소설은 조흔파의 '얄개전'이나 오영민의 '내일모레글피', 그리고 작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 같은 소설을 말한다. 어째서 학원소설이었을까? 당시에는 본격적인 만화잡지 같은 게 없었다. 그러니까, '보물섬'도 나오기 전이다. 그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잡지는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였다. 물론 '어깨동무'나 '새소년'은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른 잡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학원소설이란 그런 잡지에 연재되던 소설이었다. 물론 소재도 학원(학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느 해 여름은 온통 학원소설만 신나게 읽어댔던 것 같다. 나의 독서이력을 살펴보면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계몽사 아동문구', 고학년 때는 홈즈니 루팡이니 하는 '추리모험소설'을, 그 다음에는 아가사 크리스티류의 좀 머리를 써야 하는 추리소설 그리고 '학원소설', '무협소설' 순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 맥락과는 상관없이 재밌게 읽는 소설이 있었지만 - 예를 들어 '신부님, 나의 신부님' 같은 것 - 대개는 그랬다.
학원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재자체가 독자의 생활(학원)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학원소설이라는 양식자체가 캐릭터가 강한 주인공의 주변을 둘러싼 에피소드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나는 주인공이 캐릭터가 강하지 않으면 소설을 잘 읽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69'는 그러한 면에서 정말 학원소설같다. 캐릭터가 강한 주인공이라든지, 에피소드식의 구성, 말장난처럼 과장된 문체, 미소녀 등등. 물론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나름의 의식을 드러내는 문장들도 엿보이지만 그렇게 치면 '비밀일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옛날 생각을 하면서 꽤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유쾌하다는 측면에서 나를 가장 감동시켰던 대목은 이런 대목이다.
'문제는 여자다. 탈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암컷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상대라든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암컷이 문제였다. 암컷에게 잘 보일 보장이 없을 때, 남자들은 살 맛을 잃고 마는 것이다.'
꽤나 예리한 통찰이 아닌가.
PS : 무라카미 류의 다른 작품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소설은 그에게 좀 예외적인 작품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만일 아니라면,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 많이 출판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은 아직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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