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장국영, "백발마녀전" 본문
비디오로 본 영화다. 어째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아, 예전에 동네친구였던 녀석이 내게 권해준 영화다. 그 친구는 1년 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나와는 모든 게 다른 녀석이었다. 끔찍하게 성실하고, 속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한없이 단순하고 태평한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었다. 술도 안 한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가끔 내가 많이 손해본 느낌이 드는데, 단 한번도 속얘기를 서로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친구란 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모든 걸 망친다.
아무튼 그렇게 정반대였던 친구가, 재밌다며 보라던 영화였다. 아마 '너라면 재밌어야 할 영화야'라고 말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내가 그 친구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 친구가 나를 더 잘 이해했던 것 같다. 그 친구 말처럼 나는 재밌게 봤으니까.
한 편의 우화같은 무협 멜로 영화인데, 화면 구성은 '천녀유혼'류의 영화를 상상하면 된다. 정파의 촉망받는 제자인 장국영과 사파의 거두인 임청하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둘은 각자 헤어져서 자신을 길러준 사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여자는 그 과정에서 배척을 당하며 심한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남자는 오히려 여자를 오해하게 되고, 자신을 찾아온 여자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찌른다. 여자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남자와 자신의 가슴을 찌른 칼을 번갈아 쳐다보고 그 짧은 순간 여자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린다.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자기가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해서 영화의 끝은 처음 시작 장면, 30년을 한 자리에서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과 연결된다. 이게 대강의 줄거리다. 꽤 오래 전에 본 거라서,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처음 장면에서 아마, 내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남자가 기다리는 건 30년마다 한 번씩 핀다는 영험한 꽃이었을 것이다. 그 꽃잎을 따먹으면, 백발이 다시 검어진다. 그런데 그 꽃잎이 막 핀 순간,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그 꽃잎을 따서 버려버린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또 줄거리를 죽 적어보니까 별다르지 않은 흔한 멜로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라면 한가지, 한번도 자연광을 이용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밤장면이 많기도 하지만, 낮에도 영화는 줄곧 약간 음울한 색조의 인공조명을 사용한다. 이 점에서는 마치, 블레이드 런너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와는 사뭇 다른 것이, 블레이드 런너의 인공조명이 어떤 암울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영화는 어떤 슬픔, 어떤 몽환을 느끼게 한다. 그 슬픔은 물론,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식을 찾지 못하는 답답함을 포함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사랑이 만나지 못하고 끝이 나고 만다.
홍콩 영화 중에는 가끔 이런 영화가 있다. 임청하의 중성적 매력이 '동방불패'에서 시작해서 한참 가파른 상승곡선으로 줏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래서 그 비슷한 아류작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러다 문득 단순히 그 아류라고만 여길 수 없는 영화가 나온다. 장국영·유덕화의 '아비정전'이 그랬고, '메이드 인 홍콩'이 그랬고, 주윤발의 '감옥풍운'이 그랬고, 주성치의 '서유기'가 그랬다.
물론 이 '백발마녀전'은 내 기억으로는 영화가 나오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 '아류작'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단 한번도 이 영화에 대한 좋은 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감독이 다른 영화를 찍어서 성공했다는 걸 들어본적도 없고, 무슨 상을 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 면에선 위에 열거한 영화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순전히 개인적인 편견인 것이다.
개인적인 편견, 친구의 말처럼 '나니까 재밌어할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 영화에는 그다지 장점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얘기도 평범하고, 무슨 심오한 철학이나 알레고리를 담고 있지도 않다. 그냥 그대로의 얘기다. 그냥 그대로, 사랑하고 오해하고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얘기다. 30년이 지나 만나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특별히 멋진 장면이나,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의 구조가 탄탄해서 어느 정점에 이르러 울컥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뭔가 있다. 영화를 다 보고,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결국 테이프를 꺼내든 뒤에도 남아 있는 게 있다. 그것이 나에게 그 주제가를 찾아 듣게 만들고, 그리고 이렇게 긴 글로 독서일기에 올리게 만든다. 벌써 사오 년도 전에 본 영화를, 그래서 그 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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