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문정화, '렌즈' 본문
'문(門)'의 비밀
모든 문에는 손잡이가 달려있다. 손잡이가 달려있지 않은 건, 문이 아니다. 우린 그것을 벽이라 부른다. 손잡이는 문을 벽이면서 동시에 통로이게 만든다. 문의 역설, 열림과 닫힘의 테마는 소통과 단절의 테마다. 그러나 축자적으로 벽을 단절로, 통로를 소통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를테면, 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소통할 수 있고, 단절할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벽은 통로이고, 통로는 벽이며, 그러기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렌즈'는 소통과 단절의 테마를 기본으로 출발하지만, 놀랍게도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소통은 단절이며 단절은 소통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실제로 문의 상징성 자체가 이미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은 특별히 어떤 장치를 사용한다. 렌즈와 신문투입구다.
C는 렌즈를 통해 여자를 본다. 하지만 렌즈는 여자의 상을 왜곡시키고, 마주서지 않는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렌즈는 C의 소통의 욕망을 드러내며, 동시에 소통의 대상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신문투입구를 통해 여자는 손을 집어넣어 열쇠를 떨어뜨린다. C가 여자의 실재를 경험하는 순간이지만, 그것도 부분적인 신체에 한정된다. C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통의 대상인 여자를 쫓고 붙잡으려 한다. 단 한순간이라도, 완전한 여자의 전체를 포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까지 C는 여자의 실제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꿈속에서 결국 C는 여자와 섹스를 하고 대화를 나누나, 그 곳에서조차 그가 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조금씩 변한다'. 변하지 않는 건, 신문투입구를 통해 '문 안쪽으로 내밀었던 그녀의 손뿐이다'. '렌즈'와 '신문투입구'가 암시하는 대상의 완벽한 인식 불가능성은 특수한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존재의 상황을 규정한다. 누구도 자신의 소통욕망의 대상을, 그 실재를 취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것'을 취한다.
묘하게도 소설에서 '안다'라는 서술어 혹은 그와 의미가 닿는 서술어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각자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어서 더욱 기묘하다. 가령, 소설의 말미에 C는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고 단정짓는다. 형사는 C와 Y, 게다가 여자까지 완전히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다. Y도 마찬가지다. Y도 C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사실 그들은 '거의' 모르고 있다. C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신문투입구로 쑥 들어온 그녀의 하얀 손뿐이며 Y의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C의 이미지일 뿐이며, 형사가 Y나 C를 알고 있다는 근거는 잘 닦여진 구두나 자백이라고 주절거리는 남자의 경험일 뿐이다. 그렇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믿고 싶은 것만을 선택해서 조사'하고,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고 '믿어지는 것만이 사실이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믿음'과 '실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C는 Y를 실제로 보고 난 뒤 '그는 검은 가죽 재킷 정도는 입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상의 실재를 취하지 못할 때, 우리가 취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대상의 '이미지'와 '실재'를 동일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준다. '믿음'은 대상에 대한 '인지불능'내지 '인지착오'를 은폐한다. 믿음은, 그러나 소통의 전제조건이다.
여자의 죽음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소설 속의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 여자가 타살이라면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여자가 자살이라면 자살의 이유가 무엇인지, 소설을 말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소설의 관심은 여자의 죽음도 범인의 정체도 아니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화자는 없다. 어떤 화자도 믿을 수 없다. 소설의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소설이 보여주는 단 한가지의 진실은, 우리가 실재(진실)라고 믿고 있는 것은 실재(진실)가 아니라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진정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단순히 '실재'가 있고, 그 실재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실재'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식상한 논쟁으로 넘어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지불능' 또는 '인식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의 소통(인식)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상황'이 아니다. 그것을 한계라고 규정짓는 사고방식은, 그것의 극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극복된 어떤 상황, 완벽한 소통과 인식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라고 믿었던 것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깨달음이 이미지의 실재성을 더욱 강화해주는 일종의 역설은 어떤가? 어떤 모순, 어떤 비논리야말로 가장 합당하고 논리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가?
문은 언제나 소통도 단절도 아니다. 소통이면서 단절이고, 단절이면서 소통이다. 그렇게 해서 문은 소통이고 단절이다. 도대체, 처음 말했던 것처럼, 문이 없으면 우리 소통할 수도, 단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문(門)의 비밀이다.
ps : 이 소설의 한계점들은, 이미 세미나를 통해 충분히 얘기되었다고 본다. 나는 나름의 시각으로 소설을 새로 읽고 싶었다.
모든 문에는 손잡이가 달려있다. 손잡이가 달려있지 않은 건, 문이 아니다. 우린 그것을 벽이라 부른다. 손잡이는 문을 벽이면서 동시에 통로이게 만든다. 문의 역설, 열림과 닫힘의 테마는 소통과 단절의 테마다. 그러나 축자적으로 벽을 단절로, 통로를 소통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를테면, 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소통할 수 있고, 단절할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벽은 통로이고, 통로는 벽이며, 그러기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렌즈'는 소통과 단절의 테마를 기본으로 출발하지만, 놀랍게도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소통은 단절이며 단절은 소통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실제로 문의 상징성 자체가 이미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은 특별히 어떤 장치를 사용한다. 렌즈와 신문투입구다.
C는 렌즈를 통해 여자를 본다. 하지만 렌즈는 여자의 상을 왜곡시키고, 마주서지 않는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렌즈는 C의 소통의 욕망을 드러내며, 동시에 소통의 대상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신문투입구를 통해 여자는 손을 집어넣어 열쇠를 떨어뜨린다. C가 여자의 실재를 경험하는 순간이지만, 그것도 부분적인 신체에 한정된다. C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통의 대상인 여자를 쫓고 붙잡으려 한다. 단 한순간이라도, 완전한 여자의 전체를 포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까지 C는 여자의 실제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꿈속에서 결국 C는 여자와 섹스를 하고 대화를 나누나, 그 곳에서조차 그가 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조금씩 변한다'. 변하지 않는 건, 신문투입구를 통해 '문 안쪽으로 내밀었던 그녀의 손뿐이다'. '렌즈'와 '신문투입구'가 암시하는 대상의 완벽한 인식 불가능성은 특수한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존재의 상황을 규정한다. 누구도 자신의 소통욕망의 대상을, 그 실재를 취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것'을 취한다.
묘하게도 소설에서 '안다'라는 서술어 혹은 그와 의미가 닿는 서술어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각자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어서 더욱 기묘하다. 가령, 소설의 말미에 C는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고 단정짓는다. 형사는 C와 Y, 게다가 여자까지 완전히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다. Y도 마찬가지다. Y도 C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사실 그들은 '거의' 모르고 있다. C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은, 신문투입구로 쑥 들어온 그녀의 하얀 손뿐이며 Y의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C의 이미지일 뿐이며, 형사가 Y나 C를 알고 있다는 근거는 잘 닦여진 구두나 자백이라고 주절거리는 남자의 경험일 뿐이다. 그렇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은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믿고 싶은 것만을 선택해서 조사'하고,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고 '믿어지는 것만이 사실이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믿음'과 '실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C는 Y를 실제로 보고 난 뒤 '그는 검은 가죽 재킷 정도는 입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상의 실재를 취하지 못할 때, 우리가 취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대상의 '이미지'와 '실재'를 동일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준다. '믿음'은 대상에 대한 '인지불능'내지 '인지착오'를 은폐한다. 믿음은, 그러나 소통의 전제조건이다.
여자의 죽음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소설 속의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 여자가 타살이라면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여자가 자살이라면 자살의 이유가 무엇인지, 소설을 말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소설의 관심은 여자의 죽음도 범인의 정체도 아니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화자는 없다. 어떤 화자도 믿을 수 없다. 소설의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소설이 보여주는 단 한가지의 진실은, 우리가 실재(진실)라고 믿고 있는 것은 실재(진실)가 아니라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진정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단순히 '실재'가 있고, 그 실재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실재'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식상한 논쟁으로 넘어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지불능' 또는 '인식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의 소통(인식)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상황'이 아니다. 그것을 한계라고 규정짓는 사고방식은, 그것의 극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극복된 어떤 상황, 완벽한 소통과 인식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라고 믿었던 것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깨달음이 이미지의 실재성을 더욱 강화해주는 일종의 역설은 어떤가? 어떤 모순, 어떤 비논리야말로 가장 합당하고 논리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가?
문은 언제나 소통도 단절도 아니다. 소통이면서 단절이고, 단절이면서 소통이다. 그렇게 해서 문은 소통이고 단절이다. 도대체, 처음 말했던 것처럼, 문이 없으면 우리 소통할 수도, 단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문(門)의 비밀이다.
ps : 이 소설의 한계점들은, 이미 세미나를 통해 충분히 얘기되었다고 본다. 나는 나름의 시각으로 소설을 새로 읽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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