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홍권호 `미색 붙박이장` 본문
세미나를 통해서 이미 했던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가 느끼는 감정, 또는 평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보편타당한 원칙 위에 근거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타당한 원칙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역시 문제는 나라는 한 개인(비록 엉성하지만 소설을 쓰려고 하는 소설 지망생)이 소설이나 소설의 문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고한 원칙이고, 그 원칙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가진 원칙은 불분명하고, 내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미색 붙박이장'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냐, 나쁜 소설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즉 소설의 성패와 완성도를 떠나, 소설 속의 어떤 요소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른 문제와 고민의 영역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시 스타일의 문제다. (스타일을 우리말로 하면 '문체'라고 하는데, 내 자신도 '스타일'이라는 용어와 '문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할 수가 없다. 문체라도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문장의 문제다. 나는 기본적으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지극히 단순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문장이란, 일종의 '지시성'에 충실한 문장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빨간 펜'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현실적으로) 쓰고 있는 '빨간 펜'을 지시한다. 소설 속에서 '빨간 펜'이라고 썼다면, 작가는 독자들이 '빨간 펜'을 떠올리길 바라는 것이다. 그 외에는 없다.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이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독하다.'고 썼다면, 역시 독자는 '아, 지금 이 친구는 고독하구나.'라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소설의 문장이 이렇게 단순하게 '지시'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과연 소설이 성립될까? 일반적으로 '의미'라는 것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라는 당연한 의문이 뒤따른다. 내가 설명하는 방식은 이렇다. 소설 속의 '빨간 펜'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빨간 펜'을 단순히 지시하지만, 그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빨간 펜'은 이미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개별적인 단순성이, 작가의 진지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하나 하나 쌓여 가다보면, 거기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흐름과 방향이 생기고, 복잡한 의미가 생긴다. '빨간 펜'안에 포함되어 있는 상징이나 의미는, 밖으로부터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물질성의 조건에서부터 안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이다. '빨간 펜'은 독립적이고 현실적인 사물이면서, 동시에 소설 전체의 흐름 속에 포함되어 두 번째 의미를 갖는 의존적이면서 관념적인 사물이 될 수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출발지와 목적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과 원칙이 필요하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현실의)복잡성 -> (문장의)단순성 -> (의미의)복잡성
이번에 '미색 붙박이장'에서 사용된 스타일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이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지시성'에 충실한 문장이 아니라, '문장성'에 충실한 문장이다. 일종의 '문체주의'(만일 이런 용어가 있다면)라고나 할까? 내가 생각하는 '문체주의'란, 단순히 수려하고 시적인(대개 '시적'인 문장이라고 하면 아름답고 미려한 문장을 뜻하는 것 같다.) 문체, 또는 그와 상관없이 다분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라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불충분한 '지시성'의 의식이 발견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그러니까, '문체주의'적인 작가란, 문장의 '지시성'에 신경쓰기보다는, 문장의 문장성에 더욱 많은 정열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내가 모든 실험적인 소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정도는 그렇다. '언어'자체에 대한 집착 또는 '형식실험' 등이 과연 무슨 이유로,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지, 나로선 아직 의심스러울 따름이고, 그 결과물들에 대해 한 번도 감탄한 적이 없다. (어쩌면 이건 내가 아직 그 진지한 결과물을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미색 붙박이장'의 모든 문장들이 문장의 지시성에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장들 하나 하나는 결국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다만, 그 '지시성'이 스타일에 의해 자꾸 가려지고 있으며, 때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공허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도 음악은 결국 '멜로디'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리듬에서부터 시작해 거기에 멜로디를 입히는 음악에 대해 신뢰하지 않으며, 또한 리듬도 멜로디도 없는 소위 전위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그것이 소음과 뭐가 다르냐고 항변하고 싶다.
'미색 붙박이장'이 남의 스타일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런가보다 싶은 구석이 있다. 그것을 오마쥬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언젠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그 스타일을 흉내내 '하루키를 위한 두 개의 문장 연습'이라는 부제로 두 편의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이 과연 얼마큼 내 문장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내 글쓰기의 과정은 온전히 흉내내기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다른 건 몰라도, 남의 스타일을 흉내내는데 있어선 확실히 작가보다 내가 선배일 것이다.
최근에 하루키의 수필집(퍽 재밌다)을 읽다가 굉장히 흥미있는 문장을 발견했다.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내용이나 스타일이 발견되는가 하면, 그것은 천재가 아닌 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어디엔가 이미 있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려 와, 적당히 헤쳐나가게 된다.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쉬운 법이라서, 재주가 많은 사람 같으면 주변으로부터 '와, 제법인데'라는 등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좀더 칭찬을 듣고자 하여 ─ 그런 식으로 해서 영 그르친 사람들을 난 몇 명이고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자신 속에 분명한 방향 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재주'로 끝나고 만다."
물론 작가가 주위로부터 '와, 제법인데'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우려할 뿐이다. 적어도 남의 스타일을 빌려와 쓰게 되면, 확실히 소설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즉, 소설적인 꼴은 제법 갖추게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것이 계속 잘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것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성에서 비롯되는 결론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진정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 외에 다른 것으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이 있는가, 뭘 쓰고 싶은가 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에는 분명히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내용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을 만들어내야 한다. 작가 자신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소설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아마도 '자기만의 것'을 찾으려는 고집과, 또한 소설의 완성도나 성패에 대해 대범할 수 있는 낙천성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나는 계속 써나갈 것이다 라는 자기 스스로의 확신과, 그래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의지 같은 것도 필요할 것이다.
때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는 말로 흉내나 표절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말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 결국 이 세상 어느 작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작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스타일이나, 내용, 사상까지도 아주 깊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결국 그 작가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는지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신의 소설을 얼마큼 확장시킬 수 있는가 말이다. 흉내와 창조는 그 방향의 문제지, 순도의 문제가 아니다.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미색 붙박이장'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냐, 나쁜 소설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즉 소설의 성패와 완성도를 떠나, 소설 속의 어떤 요소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른 문제와 고민의 영역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시 스타일의 문제다. (스타일을 우리말로 하면 '문체'라고 하는데, 내 자신도 '스타일'이라는 용어와 '문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할 수가 없다. 문체라도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문장의 문제다. 나는 기본적으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지극히 단순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문장이란, 일종의 '지시성'에 충실한 문장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빨간 펜'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현실적으로) 쓰고 있는 '빨간 펜'을 지시한다. 소설 속에서 '빨간 펜'이라고 썼다면, 작가는 독자들이 '빨간 펜'을 떠올리길 바라는 것이다. 그 외에는 없다.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이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독하다.'고 썼다면, 역시 독자는 '아, 지금 이 친구는 고독하구나.'라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소설의 문장이 이렇게 단순하게 '지시'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과연 소설이 성립될까? 일반적으로 '의미'라는 것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라는 당연한 의문이 뒤따른다. 내가 설명하는 방식은 이렇다. 소설 속의 '빨간 펜'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빨간 펜'을 단순히 지시하지만, 그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빨간 펜'은 이미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개별적인 단순성이, 작가의 진지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하나 하나 쌓여 가다보면, 거기에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흐름과 방향이 생기고, 복잡한 의미가 생긴다. '빨간 펜'안에 포함되어 있는 상징이나 의미는, 밖으로부터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물질성의 조건에서부터 안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이다. '빨간 펜'은 독립적이고 현실적인 사물이면서, 동시에 소설 전체의 흐름 속에 포함되어 두 번째 의미를 갖는 의존적이면서 관념적인 사물이 될 수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출발지와 목적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과 원칙이 필요하다. 도식으로 표현하면,
(현실의)복잡성 -> (문장의)단순성 -> (의미의)복잡성
이번에 '미색 붙박이장'에서 사용된 스타일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이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지시성'에 충실한 문장이 아니라, '문장성'에 충실한 문장이다. 일종의 '문체주의'(만일 이런 용어가 있다면)라고나 할까? 내가 생각하는 '문체주의'란, 단순히 수려하고 시적인(대개 '시적'인 문장이라고 하면 아름답고 미려한 문장을 뜻하는 것 같다.) 문체, 또는 그와 상관없이 다분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라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불충분한 '지시성'의 의식이 발견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그러니까, '문체주의'적인 작가란, 문장의 '지시성'에 신경쓰기보다는, 문장의 문장성에 더욱 많은 정열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내가 모든 실험적인 소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정도는 그렇다. '언어'자체에 대한 집착 또는 '형식실험' 등이 과연 무슨 이유로,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지, 나로선 아직 의심스러울 따름이고, 그 결과물들에 대해 한 번도 감탄한 적이 없다. (어쩌면 이건 내가 아직 그 진지한 결과물을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미색 붙박이장'의 모든 문장들이 문장의 지시성에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장들 하나 하나는 결국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다만, 그 '지시성'이 스타일에 의해 자꾸 가려지고 있으며, 때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공허한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도 음악은 결국 '멜로디'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리듬에서부터 시작해 거기에 멜로디를 입히는 음악에 대해 신뢰하지 않으며, 또한 리듬도 멜로디도 없는 소위 전위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그것이 소음과 뭐가 다르냐고 항변하고 싶다.
'미색 붙박이장'이 남의 스타일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런가보다 싶은 구석이 있다. 그것을 오마쥬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언젠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그 스타일을 흉내내 '하루키를 위한 두 개의 문장 연습'이라는 부제로 두 편의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이 과연 얼마큼 내 문장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내 글쓰기의 과정은 온전히 흉내내기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다른 건 몰라도, 남의 스타일을 흉내내는데 있어선 확실히 작가보다 내가 선배일 것이다.
최근에 하루키의 수필집(퍽 재밌다)을 읽다가 굉장히 흥미있는 문장을 발견했다.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어울리는 내용이나 스타일이 발견되는가 하면, 그것은 천재가 아닌 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어디엔가 이미 있는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려 와, 적당히 헤쳐나가게 된다.
이미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쉬운 법이라서, 재주가 많은 사람 같으면 주변으로부터 '와, 제법인데'라는 등의 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당사자도 그런 기분에 젖는다. 좀더 칭찬을 듣고자 하여 ─ 그런 식으로 해서 영 그르친 사람들을 난 몇 명이고 보았다. 분명 문장이란 많이 쓰면 능숙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자신 속에 분명한 방향 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의 대부분은 '재주'로 끝나고 만다."
물론 작가가 주위로부터 '와, 제법인데'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우려할 뿐이다. 적어도 남의 스타일을 빌려와 쓰게 되면, 확실히 소설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즉, 소설적인 꼴은 제법 갖추게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것이 계속 잘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것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성에서 비롯되는 결론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진정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 외에 다른 것으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이 있는가, 뭘 쓰고 싶은가 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에는 분명히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내용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을 만들어내야 한다. 작가 자신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소설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아마도 '자기만의 것'을 찾으려는 고집과, 또한 소설의 완성도나 성패에 대해 대범할 수 있는 낙천성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나는 계속 써나갈 것이다 라는 자기 스스로의 확신과, 그래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의지 같은 것도 필요할 것이다.
때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는 말로 흉내나 표절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말은 어느 정도 유효하다. 결국 이 세상 어느 작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작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스타일이나, 내용, 사상까지도 아주 깊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결국 그 작가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는지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신의 소설을 얼마큼 확장시킬 수 있는가 말이다. 흉내와 창조는 그 방향의 문제지, 순도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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