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오시이 마모루, "공각기동대" 본문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지도 않은, 오시이 마모루(Mamoru Oshi)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1996년 미국과 영국에서 개봉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후 제작된 뤽 베송의 "제 5원소"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가 [공각기동대]의 여러 장면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각기동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영향관계를 따지자면 [공각기동대] 또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런너]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물론 이건 단순히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영상적 이미지의 관계를 따져본 것에 불과하고, 그 내러티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념들은 소위 1980년대의 '사이버 펑크'에서 빌어오고 있다.
'사이버 펑크'라는 용어는 간단하게 설명하면 축차적으로 사이버(cyber)+펑크(punk)로 풀어낼 수 있다. 사이버는 MIT의 어느 수학교수가 소통과 통제의 동시적 의미에서의 광범위한 메시지 이론을 지칭하기 위해 제안한 '사이버네틱스(cyberneics)'라는 용어의 접두사에서 파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원래의 어원적 의미인 '통제'라든지, 통제의 의미를 핵심적인 것으로 포함하고 있는 '사이버네틱스'라는 학술적인 개념이 온전히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이버'에 부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는 인간과 기계의 새로운 종합을 묘사하는 용어인 '사이보그(cyborg)'와도 관계가 있고, 일반적으로 최첨단의 하이테크 사물과 경험을 의미한다.
'펑크(punk)'라는 어근은 펑크 록 운동에서 파생되었는데, 거친 도시생활, 섹스, 마약, 폭력, 그리고 생활양식과 팝 문화와 패션에서의 반권위주의적 반항이 지닌 날카로움과 태도를 의미한다. 사이버 펑크는 문학의 장르규정이나 학술적인 개념과는 별도로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일종의 운동으로서의 사이버 펑크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기업구조에 대항하고 관련된 개인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과학과 기술의 탈중앙집권화된 하위 문화적 이용을 옹호한다.' 여기서 기성의 제도 안에서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주류의 순응적 유형의 인물들에 초첨을 맞추는 SF와 변별점을 가지게 된다. 또한 장르로서의 사이버 펑크는 원격 경보체계나 계고적 도덕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즉, 사이버 펑크는 단순히 있을 법한 미래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추세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작업을 통해, 현재를 경고한다. 그러한 미래세계에 대한 분석과 예측이, 사이버펑크 소설이나 영화들을 기존의 장르적 규정을 넘어서 하나의 이론이나 철학과 닮아있게 만든다. 성급하게 말하자면, 진실로 포스트모던한 담론들이 제시하는 이론들을 '사이버펑크'는 서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더욱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반대로 그러한 문학과 영화속의 서사와 이미지들이 미래가 아닌 바로 현재적인 의미로 우리 삶의 많은 영역들에 침투해 있음을 보여준다.
[공각기동대]를 읽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여기선 인간 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접근방식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즉,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무엇'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각기동대의 줄거리는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한, 공안 9과의 별명인 공각기동대라는 수상직속의 특수실행부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공각기동대는 전뇌네트나 공안관계의 테러대책 등의 공적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의 감사나 해결을 임무로 한다. 공각기동대의 요원들은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은 의체화되었고, 뇌는 전뇌화되어 있는 일종의 사이보그다. 외교적인 분쟁으로 비롯된 사건의 와중에서 외무대신의 통역이 '인형사'라는 정체불명의 헤커에게 전뇌해킹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뇌를 해킹한다는 것은, 인간의 뇌까지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 세계에서 마치 개인 컴퓨터를 해킹하는 것처럼, 인간의 뇌를 해킹하는 것을 의미한다. 뒤이어 의체 정품 납품 메이커사인 메가텍 바디사의 라인이 제멋대로 의체를 만들어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체는 금방 회수되지만, 곤혹스러운 점은 의체의 전뇌에 '고스트'가 발견된다는 점인데, '고스트'란 인간개체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부분으로, 한 조각의 뇌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의체의 전뇌에선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공각기동대 요원 '쿠사나키'소령은 어쩐지 그 의체가 자신과 닮아있다고 느끼고, 의체에 다이브해보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정보기관인 공안 6과의 요원들이 금방 도착하여 의체를 회수하려 한다. 그들은 그 의체의 고스트를 형성하고 있는 존재가 '인형사'이고, 자신들은 그 출현당초부터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형사'를 계속 쫓아왔다고 말한다. 그 때, '인형사'는 스스로 의체를 통해 말하기 시작하고, 자신이 하나의 생명개체임을 주장하며 망명을 요구하는 순간에 괴한들에 의해 다시 의체는 도난당한다. '쿠사나키' 소령은 의체를 쫓아 결국, 의체에 다이브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동료인 '바토'의 도움을 받아 의체에 다이브하고, 고스트의 정체인 인형사와 융합한다.
줄거리 요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공각기동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주제는 사뭇 철학적인데, 구체적으론 인간주체를 문제로 삼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사이버 펑크 소설이나 영화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즉,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필요한 부속물들이 첨단 테크놀로지의 기계로 끊임없이 대체되었을 때, 종국에는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남아야 하고, 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이제 단순히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철학적인 의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의문으로 바뀐다. 일찍이 '사이버네틱스'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위너는 인간과 기계의 동등성을 주장하는데, 그 숨은 의도와 상관없이 동등성의 지점이 '정보'라는 묘수를 제공한다. 정보란 모든 것을 붕괴시키고 분해하는 우주적 경향인 엔트로피에 맞서서 반엔트로피의 섬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과 유형'을 의미한다. 즉, 외부환경의 불확정적인 우발성을 통제하고, 체계의 유지·존속을 위해 항상성을 추구하는 방법지로서의 정보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육체의 세포는 변하고 사멸하는데, 오직 유기체를 통한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을 통해서만 연속성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반엔트로피의 체계로서 인간과 기계의 동등성은 정보의 교환과정을 통해 구체화된다. '생물체의 신체기능과 어떤 최신식 통제기계의 행동과는 피드백을 통해서 엔트로피를 제어하려는 유사한 시도에 있어서 그 방향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위너는 주장한다.
영화에서 인형사가 하나의 생명체로써 정치적 망명을 희망하는 장면은 위너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카무라 : 말도 안돼! (넌) 단순한 자기 보존의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인형사 :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들의 DNA도 역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라는 건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란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였다고 해도 사람은 기억에 의해 사는 법이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기억의 외부화란 의미를 이 영화는 충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인형사에 의해 전뇌를 해킹당한 쓰레기 청소부의 경우가 그렇다. 인형사는 그의 뇌를 해킹해서, 그에게 이혼하려는 아내가 있고, 생명처럼 소중한 딸이 있다고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실제 현실은 10년이나 독신자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온 초라한 쓰레기 청소부에 불과하다. 그가 동료에게 보여주려 했던 딸의 사진은 기실, 자신과 기르던 개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묻는다. '그 거짓 꿈, 어떻게 하면 지울 수 있는 거죠?' 장면이 전환되고 요원중의 하나가 중얼거린다. '의사체험도 꿈도 존재하는 정보는 전부 현실이고, 그리고 환상인 거야. 어느 쪽이 됐든 한 인간이 일생동안 손대는 정보 따윈 사소한 거야.'
기억도 결국 비트화 되는 정보에 불과한 것이고, 또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피를 흘리는 인간에게, 인간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뇌가 네트에 연결되었을 때, 인간의 뇌 또한 방대한 네트의 결절점 중의 하나인 하드디스크 같은 저장매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사이버 펑크의 또 다른 핵심적인 주제인 생물학과 기술간의 내파를 보여준다. 인간의 신체부위는 공학적 보철물로 쉽게 대체 가능하고, 인성은 프로그랭밍 될 수 있고, 신경화학은 지능과 인성을 수정하고, 두뇌와 컴퓨터는 접속되어 내파한다. 전통적인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넓은 간극이 무너진다. 과학의 진보는 무척 근본적이고 불안과 혼란을 초래하고 혁명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제어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인간존재의 테크놀러지 적인 의미방향에서의 접근을 통해, 인간주체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파고든다.
쿠사나기 : 나 같이 완전히 의체화한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자신은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 인격인 게 아닐까, 무릇 처음부터 나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바트 : 네 티탄 두개골 안에는 뇌도 있고 제대로 인간 취급도 받고 있잖아.
쿠사나기 : 자신의 뇌를 본 인간 따윈 없어. 결국은 주위의 상황으로 나 같은 게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야.
바트 : 자신의 고스트를 믿을 수 없는 거야?
쿠사나기 : 만약 전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 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한다면 그 때는 뭘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이 장면이 보여주고 있는 의미는 사뭇 의미심장하다. 먼저 내가 나라는 1인칭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내 바깥의 타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라캉의 거울 단계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우린 우리자신의 실제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사영상일 뿐이며, 타자를 통한 매개된 경험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즉자적이라고 믿었던 사물이 자신의 타자가 된다면? 즉, 대자적인 존재가 된다면, 뭘 근거로 기계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 정체성이 프로그래밍 될 수 있다면 인간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들이 대체되고, 모사될 수 있다면, 그 막대한 대체와 모사에서 과연 '실재'를 구별해낼 수 있겠는가? 오히려, 구별해낸 실재가 '실재'일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고 싶어한다. 고통, 슬픔, 두려움 같은 인간본능이 또한 인간개체의 고유한 속성이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것에 대해 언급한다.
쿠사나기 : 참 편리하지. 마음만 먹으면 체내에 심은 화학 플랜트로 혈액중의 알코올을 수십초 내로 분해해서 말짱해질 수 있어. 그래서 이렇게 대기 중이라도 마실 수 있어...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기술이라도 실현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어. 인간의 본능 같은 거야. 대사의 제거, 지각의 예민화, 운동 능력이나 반사의 비약적인 향상, 정보 처리의 고속화와 확대... 전뇌와 의체에 의해 고도의 능력을 추구한 결과 최고의 장비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됐다고 해도 불평할 처지가 아니야.
영화는 '고스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사이보그의 전뇌 속에 존재하는 고스트 라인에 대해 언급할 뿐이다. 고스트 라인은 전뇌 속에 고스트가 존재하는 부분으로, 오직 이것만이 의체화된 인간과, 인간의 뇌를 한조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의체를 구별하게 해줄 뿐이다. '고스트'가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영화의 종반부,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합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다.
인형사 : 나는 자신을 생명체라고 말했지만 현상태로는 그것은 아직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내 시스템에는 자손을 남기고 죽음을 얻는다는 생명으로서의 기본과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쿠사나기 : 복사를 남길 수 있잖아.
인형사 : 복사는 결국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한 종류의 월스에 의해 전멸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고, 무엇보다 복사로는 개성이나 다양성이 생기지 않는 거다. 보자 존재하기 위해서 복잡 다양화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버린다. 다시 태어나면서 노화하고 그러고 죽을 때의 대량의 경험정보를 지우고 유전자와 모방자만을 남기는 것도 파국에 대한 방어기능이다.
쿠사나기 : 그 파국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양성이나 흔들림을 가지고 싶은 거군. 하지만 어떻게...
인형사 : 너와 융합하고 싶다.
(중략)
인형사 : 융합후의 새로운 너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내 변종을 네트에 흘리겠지. 인간이 유전자를 남기듯이. 그리고 나도 죽음을 얻는다.
성급하게 결론짓는다면, '고스트'란 죽음의 본능 같은 게 아닐까? 똑같은 의미에서의 성의 본능 같은 게 아닐까? 프로이드의 인간의 욕망이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성과 죽음의 본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술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인간이 죽음의 초월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한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결합은 새로운 종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형사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방대한 네트가 접합되어 있고, 쿠사나기에게는 '고스트'가 있다.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과 사물, 인간과 기계의 내파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후의 존재가 과연 인간인지 아님 기계인지 구별하려는 의도는 어리석다. 왜냐면,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했고, 상상조차 못했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쿠사나기의 바다로의 잠수장면은 이를 암시하고 있다. 사이보그가 잠수를 한다는 데 대해 동료 바트는 불만을 토로하며 바다로 잠수한다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다.
쿠사나기 :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둠, 그리고 어쩌면 희망...
바트 : 희망? 캄캄한 바다 속에서?
쿠사나기 : 해면으로 떠 올라갈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는게 아닌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쿠사나기가 해면으로 떠오를 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해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라캉이 말했던 거울단계를 통한 주체의 상징계로의 진입처럼, 쿠사나기는 자신과 꼭 닮은, 거울 속 자신의 영상같은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또 다른 존재가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현재적인 의미에서 풀이하자면, 우리가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가 보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는 다른 의미에서의 거울인 셈이다. 우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고, 현실적인 육체를 자아가 자신의 원본을 무의식으로 버리듯이 모니터 바깥으로 버린다. 그것이 옳은가? 아님, 그른가? 그것이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인간주체성의 상실인가? 새로운 인간주체의 탄생인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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