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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주성치, "서유기" 본문

독후감

주성치, "서유기"

물고기군 2001. 9. 21. 07:23

어쩐일인지, 요즘은 주말마다 집에서 '뒹굴뒹굴'하게 된다. 요즘이라고 했지만, 언제 주말에 바빠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되었다. 뭐, 그게 고통스럽다거나 비참하다는 건 아니다. 인생이란 건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아니 오히려 한가한만큼 즐거운 법이니까. 아무튼, 케이블 TV를 벗삼아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뜻밖에 멋진 영화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케이블 TV라는 건 마치 라디오와 같다. 같은 노래라도, 일부러 직접 골라서 듣는 것보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될 때 더 감흥이 더 크다. 


  막 고추와 햄을 송송 썰어넣은 특식 라면을 끓여먹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문득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가 눈에 잡혔다. 제목은 '서유기'. 근데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 서유기와는 다르다. 물론 저팔계니, 사오정이니 삼장법사니 하는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도 손오공이다. 근데 이게, 이를테면 멜로영화였던 거다. 주성치가 주연이니, 또 당연히 코믹 멜로다. 이전부터 주성치 영화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점수를 주고 있던 터라 채널을 고정시키고 바닥을 뒹굴뒹굴하며 보게 되었다.

  줄거리는 잘 설명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본 게 아니고 중간부터 본 탓도 있지만, 스케일이 웅대하다고나 할까, 등장인물이 많고, 인물간의 관계도 상당히 복잡하다. 무엇보다 시간이 제멋대로다. 월광보합이라는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게 있어서,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가고(과거도 5백년 전의 과거다.), 과거의 일이 현재의 일과 겹치고, 종국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시간으로 끝이 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헐리우드의 최첨단 특수촬영과는 비교도 안되는 엉성한 특수분장과 촬영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자칫 저급한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성치의 연기는 박장대소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마지막 결론부다. 주성치 영화였던 탓일까, 나는 막연하게 어떻게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부정을 의심해서 자살한 처를 구하려다 지존보(주성치)는 500년 전의 과거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하'라는 여신선을 만난다. (나는 여기서부터 보았다.) 흔히 그런 것처럼, 여신선은 자신의 낭군을 구하기 위해 막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뽑는 자가 낭군이 될 거라고 한다. 물론 검을 뽑는 건 지존보다. 그리고 사건은 계속해서 얽혀든다. 지존보를 손오공이라고 오해하는 저팔계와 사오정, 그리고 지독한 수다쟁이 삼장법사가 등장하고, '지하'와 한 몸에 얽힌 그녀의 '누나'도 등장한다. 바야흐로 한바탕 난리법석이 일어난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지존보는 속세의 연을 끊고 결국 손오공이 되기로 한다. 마지막 우마왕과의 결전. 우마왕은 '지하'를 핍박해 결혼을 하려고 하고, 삼장법사는 온 몸이 꽁꽁 묶인채 곧 죽을 지경에 처해 있다. 손오공이 등장해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우마왕을 처치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하'는 목숨을 잃게 된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뻔한 줄거리.

  하지만 그 다음 장면, 손오공은 우마왕과의 마지막 혈전에서 다시 월광보합을 이용해 탈출하는데, 그게 이제는 너무 먼 미래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미래에도 여전히 삼장이 있고, 저팔계와 사오정이 있고, 그들은 서경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먼저 오공은 자신의 전처를 보게 된다. 물론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니다. 어쩌면 그녀의 먼 자손일지 모른다. 마을을 떠나려는데 성문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오공은 무슨 일인가 그쪽을 쳐다 본다. 성벽 위에는 바로 자신인 '지존보'와 '지하'가 서 있다. 그 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지하가 지존보를 향해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말한다. 지존보는 이미 자신에게 처가 있으며, 이미 늦었다고 말한다. 지하는 그렇다면, 자신의 입에 입을 맞춰달라고 한다. 아, 그 요구는 바로 먼 과거에 지하가 이제는 손오공이 된 자신에게 했던 요구가 아닌가? 그 때 손오공은 '지하'가 가지고 있던 월광보합을 얻어내려는 술책으로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속이지만, 끝내 입은 맞추지 않았다.  미래의 자신 '지존보'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어찌 입을 맞추겠냐며 거절한다. 그 때 손오공은 술법을 부려 성벽 위의 '지본보'의 몸 속으로 빙의한다. 그리고 '지하'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곧 손오공은 지존보의 몸에서 빠져 나온다. 성벽 아래의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한다. 어떻게 된 일이지 모르지만 지존보도, 지하도 손을 꼭 맞잡고 자신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행복한 둘은 문득 머리모양이 이상한 손오공을 발견하게 되나, 곧 잊어버린다. 사막을 걸어가는 손오공 일행, 바나나를 입에 물고 손오공은 뒤를 돌아본다. 얼마간, 십여 초 정도, 그러나 곧 오공이 일행을 쫒아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여기까지 적고 나서,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문장이란 게 그렇다. 특히 꼭 전달하고 싶은 뭔가가 있을 때는, 더 잘 말을 못하게 된다. 아무튼, 꼭 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내가 느꼈던 것을, 다른 사람도 느꼈으면 좋겠다. 뭐랄까, 수업이 끝나고 혼자 남아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해가 진 것도 아닌데, 주위는 벌써 어둑하고 쓰레기 소각장에서는 하얀 연기가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올라가고, 종이 타는 냄새가 주위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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