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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레이몬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본문

독후감

레이몬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물고기군 2001. 9. 21. 07:22

레이몬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집사재, 1996

나는 카버의 소설에서 많은 것, 스타일과 방법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다. 그는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그가 남긴 그 공백을 대신 메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의 말에서, '카버'를 '하루키'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어쩜 나의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알게된 건, 고 3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녀석 때문이다. 정확한 문맥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는 문득 '상실의 시대'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병'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바로 그때 나는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너는 마치 어떤 소설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 병에 걸린 것 같구나.'라고) 그러나 내가 진정 하루키라는 작가의 세계속으로 깊이 침잠했던 시절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니까, 그건 대학 1학년 여름방학 즈음이 아니었다 싶다. 내가 '개죽음'이란 소설을 쓴 뒤, 누군가 그 소설을 읽고 평하기를 '하루키의 세계'에서 벗어나 보는 것도 좋다고 했을 때, 나는 다시 하루키를 만났다. (사실 그 선후 관계는 분명치 않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개죽음'이란 소설은 초판과 수정판이 있는데, 초판은 하루키를 읽기 전, 그리고 아마 수정판은 마악 하루키를 읽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근데 묘하게도, 그 즈음은 소위 '하루키 신드롬'이라는 말이 세간을 떠돌던 시절이었고, 하루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루키를 흉내냈다 또는 하루키를 베꼈다 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다음해 가을까지 나는 하루키의 전 소설을 다 읽었고, 동시에 들녘에서 나왔다. 이제와 생각하면 '들녘에서 나온 것'과 '하루키의 소설에 심취'했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두 개의 사건이다.
  하지만 나 역시 하루키를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 역시 내가 쓰는 소설들이 결국엔 하루키의 아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키의 영향권에서 단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하루키에게 더 꽉  불 잡히는 형국이었다.
  그것은 비단 소설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하루키는 내 실제 삶의 행동양식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마치 하루키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 나에게 한 권의 철학서나 삶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로부터 4년 뒤, 나는 대학 4학년이었고, 다시 문장을 쓰고 싶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문장은 언제나 써왔다.) 소설을 쓰고 싶어진 건지, 아니면 소설을 쓸 자신이 생긴 건지 잘 구분할 수는 없지만, 다시 소설을 시작하면서도 하루키와의 대결의식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하루키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내 몸 안에 있는 나쁜 병균을 퇴치하듯이.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모든 하루키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난 뒤에야, '진정한 소설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재밌게도, 그러한 나의 욕구는 사실 전혀 '하루키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하루키식은, 내가 생각하고 욕구하는 바로 위의 방식과 대척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그 계기가 언제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시 하루키로 돌아가기로 맘먹었다. 그와 동시에, '하루키면 어때?'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키면 어떻고, 도스토옙스키면 어떤가? 카뮈면 어떻고 카프카면 어떤가? 아니, 왜 유독 하루키만이 나쁜 병균이 되어야 하는가? (하루키가 나쁜 병균이라는 개념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절의 문단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박일문이나 이인화, 구효서에 대한 세간의 평을 들 수 있다.)
  내가 하루키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하루키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이 마치 본래의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루키'가 언제나 그리고 이미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아직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하루키를 끊임없이 쫓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루키를 '통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우회의 방법을 택했다. 하루키가 스스로 밝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미국 작가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서점으로 향했다. 몇 권의 책들은 아주 오래전에 번역되어서 이미 절판되지 오래고(리처드 브로우티건의 경우다.), 또 몇 권의 책들은 아직도 출판되었다(피츠제럴드의 경우다.). 그리고 또 몇 권의 책들은 절판되었지만 재고가 남아 있었다(팀 오브라이언, 커트 보네거트, 레이몬드 챈들러). 그렇게 해서, 나는 '피츠제럴드', '팀 오브라이언', '커트 보네거트', '레이몬든 챈들러'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 모든 작가들의 책들을 아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결과인가? 나는 위의 작가들의 책들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었고, 하루키에서 배운 것처럼,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가령, '전화벨 소리'는 팀 오브라이언의 '그래도 살고 싶다.'의 스타일을 상당부분 빌어온 것이고, '늑대인간의 귀환'을 쓰면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를 만나게 된다.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서점에 가서 제일 먼저 산 책은 '레이몬드 카버'다. 레이몬든 카버는, 하루키 때문에 번역된 작가다. 일본에서 하루키가 직접 번역한 작가이기도 하고, 한국 출판본은 하루키의 해설까지 곁들여져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레이몬드 카버에게는 그다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이를테면 '레이몬드 카버'는 전혀 하루키적이지 않았다. (아니, 그 반대다. 하루키는 전혀 '레이몬드 카버'적이지 않았다.) 레이몬드의 '숏컷'이라는 창작집의 첫 번째 단편을 읽고는 내팽겨쳐 버렸고, 그 뒤 무슨 일인가가 있어 영원히 그 책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작년의 일이다.
  그러다 바로 일주일 전, 나는 서점에서 다시 '레이몬드 카버'의 책을 샀다. 그리고 매일 오고 가는 전철 안에서 조금씩 읽게 되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그 놀라움을 설명한 말이 바로 내가 이 글의 제일 처음에 소개한 하루키의 해설이다. '그는 누구와도 다르다. 그가 남긴 그 공백을 대신 메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라고.

  창작집에 있는 한 편의 소설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제목은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 토요일 오후 '앤'은 제과점에 들러 다음주 월요일, 자신의 아들 '스카티'의 생일케익을 주문한다. 그러나 생일날 아침 어린 소년 '스카티'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의사는 별 다른 이상이 없다고 말하는데, 아이는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병원에서 아이 곁을 지키다, 앤의 남편 '호워드'는 잠시 집에 들렀다 오기로 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데없는 전화가 걸려오고, '스카티'의 일이라고 짐작한 호워드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전화는 제과점에서 걸려온 것이고, '앤'이 생일 케익을 주문한 줄 모르는 호워드는 장난전화라고 여기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는 늦은 새벽에 걸려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 아이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앤은 점점 불안해지고, 자신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거라고 두려워한다. 남편의 재촉에 잠시 집에 눈을 붙이러 간 앤 역시 전화를 받게 된다. 앤은 상대방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스카티'의 문제냐고 다급하게 묻게되고, 전화의 상대방은 물론 스카티와 관련된 문제라고 말한 뒤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깜짝 놀란 앤은 당장 병원에 전화를 걸지만, 남편은 '스카티'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고, 여전히 잠만 자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전화를 건 사람은 분명 미친 사람일 거라고 화를 낸다. 다시 병원에서의 며칠, 아이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의사들도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한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날, 아이는 아주 잠깐 눈을 떴다가, 죽는다. 사망원인은 백 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는 급성 폐색,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이를 잃고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사랑을 쏟아온 아이가 죽었다. 그러나 집의 이곳저곳에는 여전히 아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들은 그 흔적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 때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스카티, 난 그 아이를 위해 준비를 해놓았소. 스카티를 벌서 잊어버렸소?' 이 말을 들은 앤은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한다. 전화는 끊긴다. 앤은 '그 자식을 죽여버리겠다.'고 남편에게 소리친다. 그러다 깨닫는다. 제과점 주인이다. 그들은 제과점으로 찾아간다. 제과점 주인은 어째서 케잌을 찾아가지 않는거냐고 화를 낸다. 그는 아이가 죽은 줄 알지 못한다. 결국 앤은 울음을 터뜨리고, 아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과점 주인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얘기를 나누게 된다. 제과점 주인은 자신의 삶,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의 삶은 끊임없이 오븐을 채우고, 비워내는 단조로운 작업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동안 그는 수백 수천의 결혼 케잌과 생일 케잌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 제과점은 하루키의 해설을 빌면 마치 세상의 끝처럼 느껴진다. 그곳은 사랑이 파괴되고, 상실된 공간이며, 부재의 공간이다.  부부는 자신들이 끔찍이 사랑했던 아이를 잃었고, 제과점 주인은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제과점 주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만든 빵을 대접한다. 막 오븐에서 꺼낸 빵은 따뜻하고 향기롭다. 부부는 배가 부를 때까지 빵을 먹는다. 물론 빵을 먹는다는 행위는 그들의 상실을 메우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한 조각의 빵일 뿐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적어도 해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다. -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근처에서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미니멀리즘'이 무엇인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게 항상 나의 문제지만, 진짜 좋은 소설은 분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내겠다고 하는 욕심은 진정한 '글읽기'를 방해하는 요소다.) 마치 어떤 좋은 풍경 어떤 좋은 날씨를 대할 때처럼, 우리는 그 소설의 안에서 잠시 머무를 뿐이고, 그 의미는 우리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골자는 '이 소설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것이다.
  그렇다해도, 글쟁이의 관점에서 레이몬드 카버를 통해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그의 소설에 대한 '지배력'이다. (물론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지배력'이라고 해서 그의 소설이 마치 작가의 의도로 꽉 짜여진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선 된다. 그런 건 나는 모른다. 내가 지배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자 이게 끝이야.'라고 말할 때, 정말로 독자도 '이게 끝이구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완벽한 끝. 그 다음은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일러도, 그보다 더 늦어도 안 된다. 그리고 그 포인트는 작가만이 알고 있다. 소설의 내적인 구조가 자연스럽게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느 순간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라고, 그래서 '이제 그만 끝.'이라고 끝나는 것 같다. (물론 그럴리야 없을 것이다. 그 반대로 아주 치밀한 계산 하에 결말은 이끌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게 끝'이라고 작가가 말하는 순간, 소설 속에서 한창 속도를 내서 달려가던 독자들은 미처 멈추지 못하고 튀어나가게 된다. 이제 소설의 의미는, 소설의 바깥으로, 독자에게로 옮겨진다. 독자는 그 흐름을, 그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다. 그리고 소설을 덮고도 한참동안 멍한 의식의 공백상태에 놓여지는 것이다. 그 공백 속에서 소설은 다시금 시작된다. 놀랍지 않은가?
 
  레이몬드 카버는 분명 하루키와 많은 면에서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하루키식이라고 얘기하는 요소들을, 레이몬드 카버에게서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일면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루키식이라고 말하는 요소들이, 하루키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하루키식이라고 생각했던 요소들은, 아주 비하루키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만 레이몬드 카버와 하루키가 어디서 만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가령, 하루키의 초기작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4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레이몬드 카버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키식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대개 그의 초기작들을 통해 성립된 것이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에서부터 하루키의 레이몬드 카버는 나타난다. 정말로 하루키의 팬이라면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전화박스 장면이라든지,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 단편은 나중에 '태엽 감는 새'라는 제목의 장편으로 발전한다), '쌍둥이와 가라앉은 대륙'등을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과 비교해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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