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엠마누엘 카레르, "겨울 아이" 본문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으로 내가 맨 처음 읽은 것은,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이 1986년 작이고, [겨울아이]가 1995년이니까, 그 사이 거진 10년의 기간이 있는 셈이다. 간략한 저자 약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콧수염]을 통해 이미 진정한 작가의 대열로 올라선 한 작가에게 주어진 10년은 분명 긴 시간이고, 의미심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겨울아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10년의 기간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그 10년 동안 엠마뉘엘 카레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역시 저자약력과 작품해설을 보면, 카레르를 '눈속임의 전문가이며 괴기담의 대가' 그리고 '능수능란한 <가정법>을 구사하여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이성이 상상 앞에서 흔들리고, 부조리 앞에서 논리가 굴복하며 익살이 비극에 잠식당하는 정확한 시점, 그 민감한 경계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 미사여구가 있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카레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가정법>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하자.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 ... 할 것이다.>라는 문장을 수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 ... 할 것이다.>라는 문장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생각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추측,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라는 것은, 굳이 철학적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언제나 현재 그 자체일 수 없으며, 거의 대부분은 과거나 미래의 '이미'나 '아직' 아닌 것으로 성립된다. 가령, 전화하겠다고 한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끊임없이, 왜 그녀가 전화를 하지 않을까, 상상한다. 그 상상에는 폭이 있다. 아무 일도 아닐 거야, 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에게 사고가 났을 지도 모른다, 또는, 이제 그녀는 내게 전화하는 일 따위도 잊어버릴 정도로 내게 관심이 없다, 까지. 그러나 어떤 것이든, 그러한 추측이나 상상 행위는, 한번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가장 안 좋은, 심지어 공포스러운 미래에 대한 추측이 승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공포스러운 미래가, 실제로는 확률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단 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기어코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그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이것이 현재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만일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또는, 이미 일어난 일이라 해도, 우리가 그 일에 대해 현재 어떠한 태도나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현재의 나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가상과 현상, 그리고 본질에 관한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콧수염>이 엄청난 비현실이 현실을 잠식하는 전형적인 환상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겨울 아이>는 현실이 현실을 잠식하는 형식을 취한다. <겨울 아이>에는 환상이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현실적인 행위만을 통해, (상상이나 추측, 악몽은 비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비현실이 되는, 아니, 현실이 지극히 현실적이 되는 공포를 보여준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상상의 영역은,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이라 해도, 현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말로 하면, 지극히 간단한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기괴하다. <겨울 아이>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주인공 니꼴라의 상상이, 그 아이의 현재적 삶을 어떤 식으로 채색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상상이 비록 공포스럽고 끔직한 것이지만, 상상하는 것 자체는 또 얼마나 감미로운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 어두운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가 미지의 괴물과 절체절명의 결투를 벌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대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한다. 우리는 아직 닥쳐오지 않은 공포를, 공포스러워하면서, 현재를 즐길 수 있지만, 또 대개 그것은 일종의 유희일 뿐이지만, 만일 그 공포가 '지금' '여기'에 닥쳤을 때, 그것이 무엇일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결국 정말 '공포'란 무엇인가 하고 묻고 있다.
마지막으로 <겨울 아이>의 문체가 가지는 특징을 잠깐 언급하기로 한다. 작품 해설에는, '<겨울 아이>는 떠들썩하고 웅변적인 요소가 없으며, 지극히 절제된 소설 구성을 가진, 다분히 프랑스적인 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겨울 아이>문체의 전체를 관통하는 분석은 아니지만, 올바른 분석이다. 분명 '떠들썩하고 웅변적인 요소'가 없다. 놀랍게도 이러한 진술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소설이란 '떠들썩하고 웅변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역자가 보기에는) 가능하다. 나는 역자의 견해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나는 '문체미학'이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문체미학'이란 용어도 폭이 넓은 거겠지만, 좁은 의미로서의 문체미학이란 말은,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서사'가 강한 소설, '문장'이 강한 소설, 표현이야 어떻든,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도,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의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순전히 원칙적인 문제라서,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또 역시 별 소용없는 것일 테지만, '서사'나 '묘사'냐, 또는 '서사'냐 '문장'이냐로 고민하는 일 따위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타당하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레이몬드 카버야말로, 가장 훌륭한 범례가 된다. 그의 소설을 두고, '문체미학'이라든지, 탁월한 '서사'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없다. 대신 그의 소설이 '훌륭한 소설'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도 없다. 소설을 소설로 성립시키는 요소, 그것을 아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나도 모른다. <겨울 아이>도 그러한 점에서, 얼마간 그 해답의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 좋은 소설이다.
"니꼴라는 곧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그의 인생이 사직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삶에서는, 그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음을." - <겨울 아이> 마지막 문장
엠마누엘 카레르, "겨울 아이", 전미연, 열린책들, 2001
+) 엠마누엘 카레르의 다른 작품 <콧수염>에 대한 서평을 보고 싶다면, 나에게 이 작가를 소개해 준, 정재혁의 홈페이지 <독서일기>를 보면 된다.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board4.cgiserver.dreamx.net/CrazyWWWBoard.cgi?mode=read&num=53&db=aleph02b&backdep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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