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본문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김화영, 문학동네, 1998
내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군에 있을 때였다. 나는 군대에서 그의 소설 '청춘시절'을 읽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책이었는데, 책의 표지가 너무 촌스러워서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청춘시절'이라니. 하지만 군대에서의 나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가 쓴 최근의 소설에서, 나는 '청춘시절'이라는 단어를 기어코 썼는데, 그것이 모디아노의 작품에서 비롯된 단어인지, 아니면 실제로 내가 군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 스스로 썼던 단어인지, 이제와서는 잘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 어떤 한 시절이 끝났음을 뼈저리게 느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군대는 참으로 편한 시기 구분법이다. 마치 르네상스시대나, 영정조 시대, 또는 4.19처럼, 나는 자주 군에 입대하기 전과, 제대 후를 구분해서 기억을 정리하고는 한다.
"그 무엇이, 훗날 그가 이게 바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청춘시절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게 될 그 무엇이, 마치 어떤 바윗덩어리 하나가 천천히 바다를 향하여 굴러 떨어지다가 마침내 한 다발의 물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져버리듯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 파트릭 모디아노, "청춘시절", 김화영, 민음사, 1994, p264
모디아노의 '청춘시절'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읽고 나서, 가슴에 덜컥 얹히는 감동이 있었던 소설은 아니었다. 그저 '읽어볼 만한', 그리고 사뭇 흥미롭고 매력적인 소설 정도였다. 만일 그 감동의 정도가 깊었다면 나는 당장 국내에 번역된 그의 소설 전부를 사들이려고 애썼을 것이다. 나는 곧잘 그런 식으로 한 작가의 소설을 전부 읽어버리곤 한다. 내가 결국 그의 소설을 서점에서 전부 사들이려고 애쓰게 된 때는, 군대를 제대하고도 1년 반이 지난, 대학 4학년 때였다. 어느 날, 나는 몹시 '청춘시절'을 다시 읽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 뿐이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내가 세 번째로 읽게 되는 모디아노의 작품이다. 그 전에 읽은 것은 '잃어버린 거리'(김화영 옮김, 책세상, 1996)다. 모디아노의 작품이 대개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는, 그 제목만을 나열해보아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에투알 광장", "순환도로", "잃어버린 거리", "어린시절의 탈의실", "신혼여행",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팔월의 일요일들", "폐허의 꽃들" 등등, 그리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내가 읽은 세 편의 작품의 구조도, 마치 작가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처럼, 흡사하다. "청춘시절"은 주인공의 서른 다섯 살 생일날의 정경으로 시작하지만, 본격적인 내용은 그로부터 약 십 오 년 전으로 돌아가 그가 막 군대를 제대한 뒤의 짧은 시기를 무대로 삼고 있다. "잃어버린 거리"는 미국에서 탐정소설로 성공한 한 작가가, 일 관계로 파리로 왔다가, 파리에서의 그의 과거를 추적하는 구조로 소설이 진행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뒤쫓는다.
기억상실증은, 비록 너무나 많은 소설, 드라마, 영화의 소재가 되었기에 진부하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에 기대 구성해야 하는가? 자신이 살아온 삶이야말로, 지금 현재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 아닌가?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 그 삶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결정과, 행위와 그 결과를 통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기억, 그것이 어느 날 문득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두운 방안에서, 이것이 나다, 이게 바로 내가 선택한 삶이고 현재다 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감정이 후회로 가득한 슬픔이든, 헛웃음을 짓게 하는 자족(自足)이든 말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렇게,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한 남자의 수사과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확장시킨다. 그것은 사뭇 복잡한 사유를 요구한다. 그는 한 남자의 과거를, 아마도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한 남자의 과거를 쫓아가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인지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자기 자신이란, 기억 속에서만 실재할 뿐,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무존재의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기억이 그것의 실재를 증언해주지 못할 때, 과거의 '나'를 어디서 찾아야만 하는가?
남자는 힘든 과정을 통해 끈질기게 자신을 알았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낸다. 그들 중에는 이미 죽었거나, 행방 불명되어 사라진 이들도 있고, 아직 살아서 자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주인공인 남자에게,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도 역시 죽음처럼 사라진 존재들이다. 현재의 그들은 단지 토요일의 저녁나절처럼 금방 사라질 실루엣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제는 공탁으로 넘어간 어느 저택의 한 귀퉁이에 새주인이 들어오기까지의 한시적인 기간동안만 주거를 허락 받은 사람이며,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희뿌연 담배연기에 둘러싸인 채 매일같이 똑같은 화제가 반복되는 지루한 대화로 보내는 사람이다.
남자가 쫓고 있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인생이었지만, 조금씩 다가갈수록, 그것은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간다. 뚜렷해질수록, 그것이 이미 하나의 그림자 - 그것은 누구의 그림자인가?- 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 p241
모디아노의 문장은, 돌이켜보건대, 내 소설 쓰기의 전범이 되었던 것 같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최근에 쓴 소설의 몇 몇 문장들은, 의식적으로 모디아노의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만들어 냈다. 특히 그가 정경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흥미롭다. 한 문장, 한 문장은 지루할 정도로 꼼꼼하고, 특별히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 없이 평범하고 건조하지만, 그 문장들이 엮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정경과, 그 정경이 포함하고 있는 정조와 감정들이 분명하게 떠오른다. 머리 속에 떠오른다는 의미를 넘어서, 마음 속에 스며든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역시 알 수 없다.
분명 처음에는 읽기가 쉽지 않다. 그 점에서 최근에 읽은 같은 프랑스 작가 엠마누엘 카레르의 문장과는 대조적이다. 카레르의 문장은 숨가쁘게 읽힌다. 하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그러니까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 속도가 붙는다. (나는 새소설을 철저하게 그의 문체를 흉내내어 써 볼 작정이다. 잘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삼고 있는 소설의 소재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의 초점은, 인물이나 사건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장소와 시간에 맞춰져 있다는 말이다. 그는 장소의 고유명사에 지겨울 정도로 집착한다. 끊임없이 연도를 나열한다. 그러나 그 장소와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정지되어 있다. 더 이상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고, 이미 모든 사건들은 발생되었다. 오로지 바라보는 것만이 허용된다. 과거란 원래 그런 거니까.
1인칭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내면도 이상한 방식으로 가려져 있다. 자주 드러나기는 하지만 단편적이어서, 불쑥 불쑥 솟아오르기만 할 뿐, 쉽게 전체로 엮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역시 그 듬성듬성한 단편들이 만들어내는 결락들이, 탁월하게 효과를 발휘한다. 소설가가 그것이 심리묘사든, 정경묘사든, 드러내 보여줄 때, 실제로 그의 탁월함이 검증 받는 것은, 드러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감춰져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라는 것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달려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이 더욱 어렵다.
사실, 고백하자면 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단숨에 읽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몰라서 몇 번이고 같은 부분을 반복해 읽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만일 이 작품을 앞으로 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참을성 있게 중반부까지 어떻게든 읽어나가라고 충고하고 싶다. 일단 거기까지 가면 앞서 말했듯이 속도가 붙게되고, 다 읽고 난 뒤에는, 모디아노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나 자신도, 다 읽고 난 뒤에야, '과연 모디아노'라고 감탄할 수 있었다.
'저녁 어둠이 내렸다. 그 초록빛이 줄어 들어감에 따라 함수호의 빛이 흐려져 갔다. 물 위에는 아직도 희미한 광채를 내면서 보랏빛 감도는 그림자들이 스치고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내가 프레디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들의 사진들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어린 시절의 게이 오를로프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p256,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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