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홍상수, "강원도의 힘" 본문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강원도의 힘'에 대해 들었다. 대개는, '참 좋다'는 쪽이어서, 그러면 나도 꼭 한 번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죽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기회가 닿으면, 가령 잊고 있다가 우연히 비디오 샵에 꽂혀있는 여러 영화들 중 그 제목이 눈에 쑥 들어와도, 뽑아들지 못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누구로부터 아무 얘기도 듣지 않았는데도, 선뜻 집어 들어 본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가 나를 실망시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고,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번쯤 보았던 것 같다. 감독의 전작 영화에 대해 실망한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추천을 받았음에도, 어쩐지 보지 않게 되는 영화는 내게 여럿 있다. 특히 왕가위의 '동사서독'이나 '해피 투게더'가 그러한데, 그 점에 대해서는 각각의 이유가 있었고, 결국 보고 나서는, 다시 한번 보게 되곤 한다.
추석연휴 내내 티브이를 끼고 있다가, 우연히 '강원도의 힘'을 보게 되었다. 유명한 허리우드 블록 버스터 영화가 끝나고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에, 아마 '한국영화특선'이니 뭐니 하는 식으로 '강원도의 힘'이라는 타이틀이 떴다.
언젠가 라디오 영화음악방송에서, 홍상수 감독과 허진호 감독을 비교하는 대목을 들었다. 공통점과 차이점이 지적되었는데, 공통점은 둘 다 일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이고, 차이점은 그것이 어떤 일상이냐 라는 대목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홍상수 감독이 일상의 지저분함, 치졸함을 드러내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면, 허진호 감독은 일상의 소박한 아름다움(물론 언제나 행복한 모습은 아니다)을 드러내어 그것을 보석처럼 보이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제법 정확한 지적이었다.
'강원도의 힘'을 보면서, 나는 딱 한번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는데, 설악산에서 주인공 남자(이름은 잊어버렸다)가 자신이 유혹하려 했던 여자가 나중에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왜 기다린다고 거짓말을 했냐고 따지는 장면이었다. 그 남자의 행동은 분명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릴 만큼, 부끄럽고 치졸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이란 것이, 그 남자를 그저 바라보기 하는 부끄러움이 아니고, 그 남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이라는 데에, 홍상수 감독의 힘이 있다.
영화에서는, 자주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의 행위를 보여주는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 행위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혀 특별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뭐든, 그것이 관객이나 독자에게 제시될 때는, 분명히 그것이 전체 작품에서 분담하는 자기 몫의 의미를 담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데, 전혀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 장면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 두 가지 방향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둘째, 의미 없음이 자체로 의미가 되는 경우다. 이것이 일반론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를지도 모른다. 가령, 주인공 남자가 눈에 뭐가 들어가서 안약을 넣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 거지? 안약을 투약하는 행위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기술적인 트릭, 복선일까? 영화 내내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해답을 찾았는데,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거기에 해답이 있을까? 만일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독자에게 있을까, 아니면 감독에게 있을까? 이것은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해묵은 문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그 해답은 '텍스트'에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결론은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감독에게 그 해답을 묻는다해도, 그 또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폴오스터의 견해가 흥미롭다.
'소설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고, 더군다나 그 소설을 쓴 사람은 더더욱 알 수 없다. 책이란 무지의 산물이며, 쓰여진 뒤에 계속 생명력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것들이 얼마나 이해가 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폴오스터, '거대한 괴물', 열린 책들, 2001, p67
그러나 이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마음 편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곤란한 의견이다. 만일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면, 아니 알지 못해야 한다면, 도대체 작가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받아쓰기'일 뿐인가? 그렇다면 누가, 또는 무엇이 불러준다는 것인가?
모호함. ambiguity. 다른 식의 표현도 많다. 가령, '행간', '여백'. 또는 '구멍'. 구멍이 좋다. 그 구멍의 깊이가 곧 작품의 깊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밑바닥은 작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다만 그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 연결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두렵지만, 기필코 빠져보고 싶은, 매력적인 구멍을 만드는 일.
만일 작가가 궁극에 지향해야 할 그것이라면, 제대로 된 밑바닥으로 연결하는 구멍을 뚫는 일이라면, 또한 감독의 능력은, 어디를 뚫어야 하는지, 또 얼마만한 깊이로 뚫어야 통로가 열리는지, 또 얼마나 그 구멍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뒤늦게 고백하는데, 홍상수 감독이 '강원도의 힘'에서 내게 보여준 구명은, 매력적이지만, 그리고 분명히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지만, 나로서는 그다지 뛰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매력적인 불쾌함. 차라리 나는 허진호 감독이 만드는 구멍이 좋다. '강원도의 힘'을 두 번 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 영화에서는 단 한번도 인물들의 클로즈업 샷이 없었는데, 영화 기법적인 측면에서 클로즈업 샷이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 모르지만,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생각해보면, 인물들뿐만 아니라 사물들도 언제나 거리를 두고 보여진다. 역시 영화를 굉장히 답답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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