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파트릭 모디아노, "서커스가 지나간다" 본문
파트릭 모디아노, "서커스가 지나간다", 용경식, 고려원, 1994.
내가 읽은 모디아노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청춘시절'과 '아득한 기억의 저편'과 흡사한 작품이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거리를 걷고, 카페에 들어가고, 낡은 아파트,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 벨벳 장의자에 앉아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여자는 몸을 팔고, 남자는 여자를 구원하려 한다. 그들은 항상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려하지만, 결국은 실패한다.
이 소설은 '내가 열여덟 살 때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나'는 "극장에도 가고 서점에도 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경찰서에서 여자를 만난다. '나'의 심문이 끝나고 다음차례가 여자다. 여자는 주거부정이고, 감시당하고 쫓기고 있다. '나'의 주거지는 가구를 다 들여낸 어느 사무실인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얼마전 스위스로 도피했다. 나는 헌책방 주인의 주선으로 로마의 일자리를 구한다. 나와 여자는 함께 로마에 가기로 한다. 여자는 '나'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의 심부름을 한 댓가로 나와 여자는 돈을 받는다. 그들은 마약밀매업자다. '나'와 여자는 아파트에서 짐을 챙겨 나와 파리 외곽의 낡은 호텔에 투숙한다. 그들은 곧 로마로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나'와 여자가 만난 지 6일 째 되는 날, 여자는 자동차 사고로 죽고 '나'는 남는다.
모디아노의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모티브는 상당히 반복적이다. 앞서 요약한 줄거리의 세부사항 몇 가지를 바꾸면, 바로 '청춘시절'이 되고,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 된다.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여서, 어떤 장면이나 사건, 혹은 주인공의 진술 중 기억에 남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세 편의 작품을 함께 뒤적여야 할 지경이다. 가령, '나'는 파리에 있는 카페나 건물들 중에, 출입구가 두 개인 곳을 메모한 수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나'가 이 소설의 '나'인지, 아니면 다른 작품의 '나'인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디아노의 작품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이런 무지막지한 매너리즘의 작가의 작품을?
제목에 쓰인 서커스의 의미는, '신속하게 천막을 쳤다가 새벽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그러한 서커스를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보자면, 어느 정도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서커스가 지나간다 = 봄날은 간다>
다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 허진호 감독의 "봄날의 간다"에서 '봄날'은 여자거나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 그 여자와 사랑을 포함하는 하나의 정경이거나 시절인 것이다. 그 '사라짐'은 필연적이다. 모든 시절은 사라지는 법. 그 불가항력적인 사라짐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이 아닌가? 죽음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모디아노의 작품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 그의 문장에 있다. 이것을 순전히 기술적인 측면이라고 놓고 보아도 타당하다.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형태의 기술적인 탁월함 또한, 한 작가의 생명력을 보장해 준다. 단순히 천재적인 재능이나 타고난 감수성만으로는, 작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작 한 두 편의 소설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많은 재능 있는 문장가들이, 폐인이 된다.
깜짝놀랄만한 문장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그들이 보내는 마지막 밤 장면이다. (다음날 그녀가 죽는다.)
"무슨 생각해?"
그녀가 내게 물었다.
"로마."
그녀는 머리맡 전등을 껐다. 우리는 커다란 유리창의 커튼도 치지 않은 채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맞은편에 있는 주차장에서 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온사인 불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곧이어 정적이 깃들었다. 나는 뺨과 귓바퀴에 그녀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날 사랑해?"
그녀는 속삭이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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