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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폴 오스터, "동행", 윤희기, 열린책들, 2000 본문

독후감

폴 오스터, "동행", 윤희기, 열린책들, 2000

물고기군 2001. 11. 30. 00:18

지금껏 폴 오스터의 소설은, "달의 궁전"부터 시작해서, "우연의 음악", "거대한 괴물", 그리고 이번 소설 "동행"까지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달의 궁전"을 먼저 읽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달이라는 '사물'에 관심이 있었고, 또 그 작품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아무튼, 매번 읽을 때마다, 그것이 작은 감탄이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큰 감탄이든, 분명 감탄할 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감탄이었다. '야, 이렇게 소설을 쓰네. 어떻게 여기서 여기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읽을 때면 나의 관심은 온통 문장에만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폴 오스터의 소설이 단순히 문장 만이 훌륭하다는 건 아니다. (하긴 문장이 훌륭하면, 소설이 훌륭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분명 뭔가 근사한 것이 들어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최근에 깨달은 건데,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소설을 읽으면 안되었다. 어떤 식이 올바른 소설 읽기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읽는 그런 식은 아니었다. 나는, 작가가 소설 속에서 하려는 말, 작가가 '마음으로 쓴 문장'들을 읽어야 했다. 물론 그것을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는 문제일 테지만.
그런 면에서 "동행"은, 내게 '감탄'이 아닌 '감동'을 준 작품이다. 분명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소재와 모티브, 주장 등이 되풀이 되는 부분은 여럿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작가의 한계라고 부르는 건, 언제나 평론가고, 나는 전적으로 평론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독자보다 멍청하다. 그들의 독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평론가들이 진정으로 소설을 읽을 줄 아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 싶은 소설가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를 얘기할 것이다. 작가는 결국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단 한가지 만을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 한 생 밖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동행"은 윌리라는 사람과, 본즈라는 '생각할 줄 아는' 개의 이야기다. "동행"의 원제목은, 팀벅투(Timbuktu)라는 생소한 단어인데, 책의 겉장을 보면 그것이 '아프리가 내륙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지친 영혼이 머무르는 피안'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제목이 작품 전체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책의 중간에, 윌리가 '팀벅투'로 가고, 얼마 뒤 책의 마지막에 본즈도 그의 뒤를 따라 '팀벅투'로 간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에서 지친 영혼이었고, 그 지친 영혼의 휴식처인 '팀벅투'에 들어 갈 자격이 있는 사람(개)들이었다.

요즘 나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른다. 단순히 '마음'이 뭘까, 라는 식의 물음을 이끄는 떠오름이 아니라, 그저 나의 생각 속에, 또는 그리고 나의 마음 속에, 아무 근거도 이유도 없이 불쑥 솟아오르는 떠오름이다. 그 '마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나는 여러 문장들을 만들어 보았다. 가령 이런 거다.
지금껏 나는 죽 '잘 쓴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마음을 담은 소설'을 쓰고 싶다.
만일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나는 한없이 기쁘겠다.

"동행"은 좋은 소설이다.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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