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홍권호, '세탁기' 본문
1. 성장소설
이 작품이 꼭 성장소설이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든지, '데미안', '파리대왕', '죄와 벌'같은 식의 소설을 좋아한다. 성장소설은 항상 두 개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의 세계에서, 또 하나의 세계로의 이동 또는 진입을, 우리는 아마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 두 개의 세계를 각각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느 편이 더 올바른 형태의 세계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물론 대개는 전자, 즉 성장 이전의 세계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 편의상 그것을 '아이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를 '어른의 세계'라 부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전자를 소설 속의 표현을 따서 '보드랍고 따뜻한 세계'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자를 '차갑고 딱딱한 세계'라 편의상 정해볼 수 있다.) 그 두 개의 세계는 꼭 대립적인 건 아닐 테지만,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성장소설은 그 차이를 통해 성립되는 소설이다. 이 편과 저 편의 거리, 그 높이의 낙차를 통해 성립되는 성장소설은, 당연히 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떨어짐의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그것은 공포이면서 쾌락이다. 적어도,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과연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라는 점에 있어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것이 어느 편이든, 이 편의 세계를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 다른 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아이는 '아이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어른은 '어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아이에서 성장한 어른만이, 그 두 개의 세계를, 오직 '차이'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그러한 인식, 또는 발견은, 동시적이면서 언제나 사후적이다. '아이의 세계'는 언제나 잃어버린 세계이며, 지나간 과거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다. 그 세계가 때로 신화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는 실제적이지만, 그 차이를 통해 성립되는 두 개의 세계는 기반이 없다. '실제 세계'(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와 항상 어긋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편이 더 진실한 세계인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둘 다 거짓된 세계이면서, 또 둘 다 진짜 세계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고, 부단히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성장이란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려야만 세계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세계는 언제나 잃은 채로 발견되는 세계이다. 이것을 비극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다. 만일 모든 소설이,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발견을 담고 있어야 한다면, 내 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소설은 성장 소설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비극이다.
2. '여느 때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몸이 만져지지 않았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내'가 아침에 일어나 그녀의 부재를 확인하는 걸로 시작된다. 그는 그녀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 남기고 갈 것과, 가지고 가야할 것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 리스트를 작성하는데 곤란한 대목은, 자신이 쓴 '시'에 이르러서다. '시'를 남기고 가야할 것인가, 가지고 가야할 것인가? 그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시'를 잃어버린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과연 (보드랍고 따뜻한) 그녀가 부재하는 (차갑고 딱딱한) 세계에서, '시'를 가지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 그녀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연장되었다. 상실은 유보되었다. 소설은 아직 상실되지 않은, 그러나 이제 곧 상실될 세계의 풍경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유보된 시간을 원고지 48매의 문장을 가지고 꼼꼼하고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며, 다분히 전형적이다. 주인공 '나'는 (아마) 대학을 휴학한 상태다. 여자도 휴학을 했다. '나'는 입대날짜를 기다리고 있으며, 가족이 있는 집을 나와 여자의 집에서 (아마) 동거를 하고 있으며, 공증인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소설은 그런 주인공 '나'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상적인 하루의 궤적을 좇는다. 화자가 아침에 집을 나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별다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 하루가 여느 날과 다른 점은 새 세탁기가 들어온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전에 쓰던 고장난 세탁기를 들어낸 자리에서, '나'는 반지를 발견한다. 저녁에 여자는 새 세탁기 밑으로 그 반지를 도로 굴려 넣는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장소설로 분류하기 어려울 테지만, 아무래도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이라고 생각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이 작품이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개략적인 줄거리를 통해서도 쉽게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갔다가 (방황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구성이 그렇다. 그렇게 되면, 도식적으로 '집'과 '바깥'이라는 두 개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그런데 실제 작품에서 화자의 집은 두 곳이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집과, 가족이 있는 집이다. 이 점 또한 이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다. 이로 인해 작품은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해진다.) '바깥'의 세계를 대변하는 공간은 화자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증인 사무실'인데, 작가는 그 공간에 대한 묘사에서 두 가지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첫 번째는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에 한두 번 도장을 찍는 일밖에 없고 종일 신문만을 들여다보거나 조는' 백발의 퇴직한 판사들과, 그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서까지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사무실의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이다. '나'는 그들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두 번째는, 아홉 시, 네 시에 일제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다. 전화는 '대부분 근처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공증을 부탁하는 전화였는데',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일제히 울리는 그 전화벨 소리 역시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무래도 그 세계에 잘 적응할 수가 없다. 다른 직원들은 서로 친해져서 함께 당구를 치거나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대형서점에 가서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는다. 퇴직한 판사들은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권위에 대한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복종과, 강박증적이고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보드랍고 따뜻한' 여자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차갑고 딱딱한' 세계다.
그런데 여기에 겹쳐지듯이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조금 더 먼 과거의 일이다. 그것은 주인공 '나'가 어째서 그녀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앞서 말했듯이, 작품에는 그녀의 집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 있는 집이 나온다. 그가 '가족이 있는 집'에 잘 들어가지 않게 된 건, 운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시위를 하다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버리고 다른 하나의 세계를 선택했던 전력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했던 세계는, 그가 그러하리라고 믿었던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 세계 또한 어긋나 있었고, 진실되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 그는 (그녀는) 정치를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녀와 함께 '선거운동본부를 박차고' 나와 그녀의 집으로 간다. 공증인 사무실을 퇴근하기 앞서, 그는 전화를 통해 입대날짜가 나왔음을 확인하고, 가족이 있는 집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곳에서 '앨범을 찾아 잠시 가족들의 사진', '상실됨을 통해 발견된 상실된 세계의 화석'을 바라본다. 그는 '가족이 있는 집'과 '선거운동본부'를 차례차례 뛰쳐나와 그녀의 집으로 흘러들어 갔지만, 이제 곧 그 집에서조차 떠나 입대를 해야 한다. '여느 때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몸이 만져지지 않는'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3. '먼지 덩어리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
제목에 필요이상으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때로 위험한 일일 테지만, 잠깐 이 작품의 제목, '세탁기'에 관한 얘기를 해야겠다. 세탁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러워진 옷을 깨끗하게 빨아주는 기계다. 더러워진 옷을 집어넣고 물에 세제를 타서 세탁기를 작동시킨다. 시간이 흐른다. 다시 옷을 꺼냈을 때 그 옷은 깨끗해져 있다. 이것이 세탁기다. 다분히 억지스럽지만, '세탁기'란 사물이 선택된 배경에는 아마도 작가의 순결주의가 숨어 있지 않나 추측된다. 그것은 주인공이 시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신빙성을 얻는다. 어쩐지 작품 속의 주인공을 떠올리면,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 순결한 청년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된다. 물론 여기서 순결주의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세탁기 얘기로 돌아오면, 그런데 세탁기에 들어가는 더러운 옷과, 세탁되어 나온 깨끗한 옷은 똑같은 옷이다. 세탁이라는 과정은 단지, 사물에 덧입혀진 더러움을 씻어내어, 사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주는 것에 불과하다. 청소나 설거지나, 보석의 광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순간 먼지 덩어리 속에 처박혀져 광택을 잃었다해도, 표면을 정성스레 닦아내면 본래의 반짝임을 되찾게 되는 반지와 마찬가지다.
화자인 '나'는 세탁기를 들어낸 자리에서 '은색 반지'를 발견한다. 반지는 '먼지 덩어리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그는 여자에게 반지 얘기를 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저녁에 돌아와 새 세탁기를 설치하고 나서야, 그는 여자에게 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또 기묘한 것은, 여자는 그 반지를, 비록 세탁기는 새것으로 바뀌었지만,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굴려 넣는다. 어째서 여자는 다시 반지를 굴려 넣었을까? 작품 속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대목이다. 이 부근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의 필연성은 작품 깊숙이 숨겨져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작품의 마지막 문장, '나는 그녀를 안아주며 세탁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말을 해주었다' 라는 문장은, 여자가 도로 굴려 넣은 반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반지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는 새 세탁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세탁기를 새로 구입한 것은, 여자 혼자 결정한 일이었다. 그는 세탁기를 고쳐서 쓰자고 주장했다. 세탁기를 바꾸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때문에 여자의 그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 긴장감의 뿌리는, '점점 늪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 그녀와의 생활'에 있었으며, 동시에 그녀와의 이별을 예감하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 헤어짐에는, 비록 그가 군에 입대해야 하는 현실적인 조건이 있다해도, 뚜렷한 이유가 없다. (군입대는 단지 계기가 될 뿐인 것처럼 보인다.) 예비된 헤어짐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그가 그녀를 떠나려고 하는 것인지, 반대로 그녀가 그를 떠나려고 하는지 작품 속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놀랍게도, 작품에는 이 헤어짐에 대한 확신이 흐르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헤어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아마 그와 그녀의 관계, 그리고 그녀의 집이라는 공간이, 중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어딘가로 가는 과정에서 잠시 머무르는 경유지에 불과하며,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다. '가족이 있는 집'에서 '선거운동본부'로, 그리고 다시 '그녀의 집'으로의 이동, 또는 성장은 일직선이 아니다. 그들은 일종의 패배를 경험했고, 물러설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차갑고 딱딱한 세계'에서 '보드랍고 따뜻한' 임시대피소로 도망친 것이다. 그녀의 집이 '부드럽고 따뜻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이 임시적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영원히 '부드럽고 따뜻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영원히 '차갑고 딱딱한' 세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다.
집 바깥의, 공증인 사무실의 세계에서, 그는 한 여직원을 만난다. 삼 개월만에 처음으로 여직원은 그에게 말을 건네고, 둘은 함께 차를 마신다. 그가 '사무실에 있는 폼이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말하자' 여직원은 '화장하고 있는 거'라고 대답한다. 화장하고 있는 여자. 그리고 또 한 명, 새 세탁기를 가지고 온 키가 작은 사내가 있다. 세탁기를 나르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자, 사내는 그럴 필요 없다고 손짓하고, 자신보다 더 크고 무거워 보이는 세탁기를 혼자서 번쩍 들어 집 안으로 운반한다.
이 두 인물의 등장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 둘의 모습을 통해, 화자인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
고장난 세탁기를 들어낸 밑바닥 먼지 덩어리 속에서 반지를 발견하고 주머니에 집어넣는다(회수한다). 그리고 다시 세 세탁기의 밑바닥, 분명 오래지 않아 다시 먼지투성이가 될 그곳에 반지를 굴려 넣는다. 그 반지를 희망이라 불러도 좋고, 꿈이라 불러도 좋다. 단순히 그러한 은유라 해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두 행위 사이에는 한나절의 거리가 있고, 차이가 있다. 그 두 행위의 반지는 똑같은 반지지만, 다른 반지다. 첫 번째의 반지가 잃어버린 세계의 반지라면, 두 번째의 반지는 잃어버림으로 발견한 세계의 반지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다른 반지이면서, 똑같은 반지이다. 그것은 언제나 '먼지덩어리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다.
세계는 언제나 똑같은 세계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실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존재방식이며 룰인 것이다. 때로 그 룰은 공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공정하지 않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룰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룰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척, '화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 또한, 그리고 화장이라는 행위 또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다. 룰이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룰은 언제나 자신 안에 세계를 감춘다. 밑바닥에, 먼지 덩어리 속에 반짝거리는 것을 숨긴다. 우리는 항상 그것을 잃어버린 채로 발견한다. 그렇다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게 아닌가?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 믿음이,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어떤 것을 번쩍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아닐까?
작품의 마지막, 그녀가 반지를 세탁기 밑으로 굴려 넣은 뒤, 화자인 '나'가 발견(?)한 것은, 그 밑바닥에 감춰져 있는 반짝거리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는 그것이 과연 어떠한 세계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는 그 세계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세계를 얻을 수 있다.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그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면 충분하다. 그가 그녀와의 생활에선 느꼈던 불안감과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는 그녀와의 생활이 단순한 임시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세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임시적인 것, 물러섬, 나약함, 두려움 또한 본래적인 세계의 일부분이다. '차갑고 딱딱한' 세계가 감추고 배격했던 것이다. 언젠가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곧 상실될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는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된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녀를 진심으로 안을 수 있다. 새 세탁기가 맘에 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짝거리는 것을 손에 쥐어선 안 된다.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반짝거림은, 잃어버린 것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먼지 덩어리 속으로 굴려 넣어야 한다. 우리가 굴린 반지가 구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은 끊임없이 세계를 발견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인생은 비극이 되고, 그 비극은 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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