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스칼렛 요한슨에 대해서 본문
생각해보면 나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여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에 그녀의 영화 세 편(‘언더 더 스킨’, ‘루시’, ‘her’)을 우연찮게(?) 연달아 보고 나서 뭔가 써볼까 싶어, 그녀에 대해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떠올려보니, 할 만한 얘기가 꽤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유명한 여배우니까. 하지만 어떤 여배우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해 모두 꽤 많은 할 얘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따져보니 나는 그렇다. 그런 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적어도 나한테는 꽤 의미있는 여배우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처음 본 그녀의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제 얘기 할 세 편의 영화 중에 한 편이었을 것이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이든, 나는 그 영화에 나온 스칼렛 요한슨을 보면서, ‘우와, 정말 매력적인 배우네.’하고 느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나머지 두 편을 본 것일 수도 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이렇게 세 편이다. 이 영화의 개봉 순서는 모르지만 -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 어느 것이나 꽤 오래 전 영화다. 게다가 세 편 다 스칼렛 요한슨은 주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랑도 통역이…”는 주연이랄 수도 있지만.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일종의 소녀들(?)의 성장영화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영화나 성장소설 같은 걸 원체 좋아했던 나인지라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지만, 꽤 재밌는 영화다. 예전에는 이런 영화가 자주 나왔다. 뭐랄까, 성장영화이면서, 또 청춘영화랄까. 왕따 얘기도 나오고, 섹스 얘기도 나오고. 학교 식당, 미녀 치어리더 등등(요즘 영화 중에는 단연 ‘스파이더맨 1편’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된다.) ‘판타스틱 소녀백서’를 비디오 테이프로 봤는지 어쨌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비디오 테이프로 봤던 이런 성장영화들이 꽤 있었다. 비디오 가게에서 이런 영화를 빌리는 게 어쩐지 쉽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영화가 야해서 그런 게 아니라, 흔한 말로 다 큰 사내가 이런 여자들이 나오는 성장영화 같은 걸 보는 게 쪽팔리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딴 얘기지만 그 중에 기억나는 영화로 ‘연애학 개론’이란 게 있었다. 이 영화 자체도 꽤 재밌었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다시 이 영화를 기억하게 된 계기가 ‘조 뎀프시’라는 배우 때문이다. 이 배우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뇌신경외과’ 의사로 나오는 사람이다. 유명한 아역배우 출신이었는데 성인이 되면서 침체기에 빠졌다가 다시 재기에 성공한 몇 안되는 배우 중의 한 명, 또는 그런 하나의 훌륭한 케이스인 배우다. (이런 배우로는 ‘천재소년 두기’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나를 찾아줘’에 나왔다.)
아무튼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그런 영화인데, 사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스칼렛 요한슨은 여기서 주인공의 친구로 나온다. 허스키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 정말 스칼렛 요한슨의 어린 시절 모습이라 해도 될 만한, 그러니까 실제로 저런 성장기를 거쳤을 법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표현은 웃긴데, 실제 ’스칼렛 요한슨’이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현재의 그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과거 그녀의 학창 시절 모습이었을 것 같다니, 뭔가 거짓에 거짓을 더한 것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지 않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는 ‘나홀로 집에2’에도 나온다. 그 귀여운 캐빈의 누나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억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이거나 늦은 밤이다. 주인공 소녀는 어느 버스정류장에 있는데, 그곳에서 항상 버스를 기다리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 버스정류장에는 버스가 서질 않는다. 그래서 이전에도 몇 번인가 그 사람에게 주인공 소녀는 그 사실을 알려준다. 아저씨, 버스는 여기에 서질 않아요. 그런데 그날에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번에는 그녀가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이윽고 버스가 나타난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렇게 글로 풀어 썼는데도, 굉장히 인상적일 것 같지 않은가? 정말 그렇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확히 장면이 저렇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코엔 형제의 영화다. 나는 ‘바버(이발사)’다, 라는 주인공(그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다. 흑백 영화이고, 코엔 영화 중에서도 특별히 더 예술 영화라서 한국에서 개봉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코엔 형제의 영화를 꽤 좋아해서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다 보는데, 이 영화는 개봉 당시(미국)에 전혀 알지 못했다. 나중에 누군가 얘기해줘서, 혹은 어느 기시나 해설을 보고나서 보게 됐다. 내가 알기로는 이 영화의 시발점은, 코엔 형제가 어느 이발소 벽에 걸린 ‘단정하게 머리를 깎은 단골 손님들 사진’을 본 것이었다. 코엔 형제(둘 중의 누구였을까?)는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어떤 ‘이발사'를 상상해냈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에 그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의 머리를 여러 스타일로 이발해서, 마치 우리가 잡지 같은 데서 보는 일종의 예시처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출연진 면면은 꽤 화려한 편이다. 일단 주인공인 ‘이발사 - 그 남자’로는 ‘빌리 밥 손튼'이 나온다. 안젤리나 졸리의 전 남편으로 우리한테는 유명하지만, 그전에도 이미 연기파 배우로 명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부인으로 코엔 형제의 단골 배우이자, 형제 중 한 명의 실제 부인이기도 한 여배우가 나온다. 지금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파고'에서 임신한 경찰로 나온 여배우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배우는 역대급 미드 ‘소프라노스'의 ‘제임스 갠돌피니’다. 지지난해, 2013년에 갑작스런 사망소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이 자리를 빌어 늦어지만 명복을 빈다. 아마 ‘소프라노스' 이전에 출연한 작품일 것이다. 또 ‘드라이크리닝법'을 개발한 외판원으로 나온 배우도 낯이 꽤 익다. 이런 화려한 배우진 중에 ‘스칼렛 요한슨'이 끼어 있는데, 아마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녀가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일단 이 당시에는 그녀가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분위기도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흑백영화이기도 하니. 또한 분량도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배역을 맡고 있다. 그녀는 시골 동네의 흔한 소녀(또는 처녀)로 나오는데, 주인공이 어디선가 들리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끌려 어느 파티집 2층 다락같은 곳에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 그녀는 처음 등장한다. 다소 신비롭게 말이다. 그녀는 물론 동네 이발사인 ‘그 남자'를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아빠나 오빠를 따라 그 이발소에 들렀다고 한다. 이발사도 얘기를 듣고 보니 누군지 알 듯 했지만, 어쨌든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된 그녀의 얼굴은 처음 본 것 같다. 그 첫 만남 이후 몇 장면이 지나고나서, 동네에서 또 무슨 음악제 비슷한 게 열려 ‘그 남자'는 다시 그녀의 연주를 듣게 되고, 처음처럼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음악제 뒷풀이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다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언뜻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녀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었던 그는, 시내에서 유명한 피아노 선생에게 그녀를 보여주기로 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를 들은 피아노 선생 -프랑스에서 공부한 걸로 되어 있다.-은 그녀에게 아무 재능이 없다고 단정짓는다. 여기에 꽤 인상적인 표현이 나오는데, 피아노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 아주 유능한 타이피스트는 될 수 있을 거요. 이발사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에게 버럭 화를 내고 그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난다. 다시 그녀를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해서 마을로 돌아오면서 다른 선생에게 가보자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 - 스칼렛 요한슨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녀 자신도 자신에게 아무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저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어쨌든 이걸로 끝냈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가 정말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배우에게 이상하게 딱 들어맞지 않는가? 뭔가 세상의 비밀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태도. 어떤 땐 아주 순진무구하고, 거의 바보같이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이미 체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아무 기대없이 꿋꿋하게 세상을 잘 살아갈 것 같은 여자 아이. 하지만 결정적은 장면은 그 다음에 나온다. 갑자기 그녀는 ‘그 남자’에게 뭔가 사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운전을 하는 그의 무릎(?) 쪽으로 얼굴을 가져간다. 남자는 당황하며 무슨 짓이냐며,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다. 그러다 당연하게도 사고가 나지만, 사고 장면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고, 마지막에 자동차 바퀴 휠이 떨어져 나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장면은 끝이 난다. 동그란 자동차 휠이 빙글빙글 도는 것으로. 그것은 곧바로 ‘UFO’의 상징으로 오버랩된다.
해설이나 인터뷰에 언급됐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분명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소설에 굉장한 영향을 받고 있다. 마지막 5분, ‘그 남자’가 감옥에 갇히고 나서 진행되는 독백은 거의 표절이나 오마주에 가깝다. ‘포스트맨…’은 정말 끝내주는 소설이다. 나는 그 소설의 마지막만큼 멋지게 끝나는 소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마지막 문장을 따라 적어보자면 이렇다.
“…맥코넬 신부가 생각해 낸 건 아니지만, 또 다른 생이 진짜 있을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난 그걸 믿는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부 날아가 버린다.
집행유예는 없다.
여기 사람들이 온다. 맥코넬 신부는 기도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당신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날 위해, 그리고 코라를 위해 기도해 주길. 거기가 어디이든 우리가 함께 있기를.”
- 제임스 M. 케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중에서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원제목은 “Lost In Translation”, 번역하자면 ‘통역 속에서 길을 잃다’쯤이 될 것이다. 원제목의 뜻과 달리, 한국어 제목 번역은 길을 잘 찾은 셈이다. 앞서 말한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원제목은 “Ghost World”이다. 유령세계라… 이것도 차라리 한국어 제목이 나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한국어 제목을 따로 붙이는 걸 보기 어렵다. ‘인터스텔라’니 ‘그래비티’니 ‘엣지 어브 투모로우’니 해서, 외래어도 되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은 그대로 제목으로 쓰는 데, 이게 과연 맞나 싶긴 하다. 도대체 처음 들으면 뜻을 알 수가 없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다시 한국어 제목을 따로 붙이게 되면, 그게 또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근에 개봉한 ‘박물관이 살아있다’같은 제목을 보면, 개인적으로 이렇게 잘 지은 제목이 오히려 영화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원제목은 “Night at the Museum” - ‘박물관의 밤’이다. 얼마나 시시한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역시 굉장히 훌륭한 연기파 배우 ‘빌 머레이’가 나온다. 빌 머레이하면,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은 당장 ‘고스터 버스터즈’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것 같다. 정말 재밌게 봤다. 그 사운드트랙도 잊을 수가 없다. 자꾸 예전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예전에는 이런, 뭐랄까, 시즌 영화란 게 참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연말연시 영화’란 게 있었다. 가서 한바탕 웃고 나오면 왠지 시간을 잘 보낸 것 같은, 어떤 의례를 마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연말연시’, 즉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의 대표격은 ‘다이하드’ 시리즈가 더 유명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다이하드’ 1편과 2편, 둘 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건이 벌어지고, 마지막에는 꼭 크리스마스 캐롤을 배경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요즘에는 이런 류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선뜻 떠오르는게 없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또 언급할 만한 것은 감독에 대한 것이다. 여자감독인데, 프란시스 코폴라의 딸이라고 한다. 이 영화로 상당한 인정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후 소식은 잘 듣지 못했다. 지금은 뭐하고 있으려나? 헐리우드에서도 사실 ‘여성감독’을 보기 어려운 데, 최근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 아마 ‘허트 로커’와 ‘제로다크서티’를 만난 ‘캐서린 비글로우’일 것이다. 이 여자는 ‘제임스 카메론’의 전부인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때 이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 ‘블루스틸’이란 게 있었다. 제목만큼 서늘하고 감각적인 영화다. 최근에 한국 여성감독의 영화 한 편을 봤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지금 찾아보니 ‘환상속의 그대’를 만든 ‘강진아’ 감독이다. 이 영화 상당히 좋다. 주연배우인 ‘이희준’도 연기가 참 좋았다. 다만 이 영화 한 편은 참 좋았지만, 어쩐지 ‘개인적인 체험’에서 가져온 부분이 많지 않았을까 싶어서, 다음 영화를 봐야지만 이 감독이 과연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지 안 만들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다음 영화 소식은 아직 없다. 옆길로 많이 샜지만 아무튼 “사랑도 통역이…”는 여성 영화 특유의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스칼렛 요한슨이었지만, 이전 영화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게 나온다. 빌 머레이와 스칼롯 요한슨이 일본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영화의 전부인데, 이게 심심하면서도 재밌다. ‘샤브샤브’ - 정확히는 아마 일본식으로 ‘스키야키’인 것 같은데, 이것을 먹으러 가서 종업원이 세팅만 해주고 떠나자,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두 사람이 당황하는 장면이 있다. 나중에 빌 머레이가 ‘어떻게 이렇게 비싼 요리인데 손님이 직접 조리까지 해야 하냐’고 하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 역시, 마지막 장면이 유명하다. 어떤 영화나 소설은 엔딩이 너무 좋아서, 거의 그것만으로 ‘반 먹고’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은 그렇게 일본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처음부터 무슨 연인 관계도 아니었고(그러기에는 나이 차도 너무 많고 스칼렛 요한슨은 남편이 있다.)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이 보인 것도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는데, 마지막에 두 사람이 거리 한복판(물론 도쿄의 거리다.)에서 서로 포옹을 나누게 된다. 결코 뜨거운 포옹은 아니고 그저 친밀감의 표현인 포옹이다. 그때 빌 머레이가 요한슨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인다. 그런데 뭐라고 속삭이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의 표정만 번갈아 보여주고 두 사람은 포옹을 풀고 카메라는 물러난다. 이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아마 유튜브나 그런데 가면 이 장면만 따로 편집해서 올린 게 있을 것이다. 꼭 보기 바란다. 이것만 봐도 이 영화의 반은 본 셈이라 한다면,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게 될까? 어쨌든 좋은 영화다.
이후에도 스칼렌 요한슨은 꾸준하게 영화를 찍었고, 나 역시 꾸준하게 그녀의 영화를 봤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그렇게 됐다. 상업영화나 그저 그런 영화에도 나왔지만, 우디앨런 같은 명감독의 영화에도 여러 차례 불려 나왔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굳이 헐리우드 여배우로서의 그녀의 위치와 존재감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엄청난 대박영화이자 시리즈물인 ‘아이언맨'과 ‘어벤저스'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그런 블록버스터 액션물에 잘 어울릴까, 또 나이 탓인지 조금 힘에 부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라면, 배신한 소련 스파이인 ‘블랙위도우' 역할에 누가 어울릴까 따져보면, 나로서는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것 보니, 역시 그녀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그런 그녀가 최근에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찍었다. 순서는 알 수 없지만, ‘her’, ‘언더더스킨’, ‘루시’다. 이 세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당연히 첫 번째 공통점은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녀가 ‘비인간’이라는 점이다. 정확히 하면 ‘루시’에서는 비인간이 아니라 ‘초’인간이 맞을 것이다. 원래는 인간이었다가 약물의 도움으로 뇌의 10%이상, 마지막에는 100%까지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을 완전히 넘어선 존재가 된다. ‘Her’에서는 운영체계다. 윈도우니, OSX니, 리눅스니 하는 컴퓨터 운영체계 말이다. 흔히 인공지능 컴퓨터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컴퓨터라 하면 어떤 유일한 존재이지만, ‘Her’에 나오는 운영체계는 복수의 존재다. 내가 가진 윈도우 운영체계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얼핏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긴 하는데, 이를테면 여기에 등장하는 그녀 - 스칼렛 요한슨은, 그렇게 수천 수백만개의 존재인 건지, 아니면 하나의 존재인데 다만 동시에 여러 곳에서 존재하는 건지, 개념적으로 엄밀히 구분하기 어렵다. 사실 이 두 가지 차이 그 자체가 나름 철학적인 주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폰의 ‘시리’같은 존재를 떠올리면 된다. 마지막으로 ‘언더더스킨’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외계인’이다. 여기서도 정확히 하면 스칼렛 요한슨은 외계인에 희생된 지구인이고, 외계인이 단지 그 탈을 쓰고 있다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이고 목소리다.
그런데 이런 스칼렛 요한슨의 행보는 순전한 우연이었을까? 그러니까 비인간적인 어떤 존재라는 역할을 특정한 시기 내에 연달아 세 편이나 맡게 된 것은, 그녀 자신에게 아무 의도 없이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일일까? 반대 측면에서 보자면, 영화의 제작자나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하고 제작하기로 결정하면서 맨 맨저 스칼렛 요한슨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누구라도 좋았으나, 우연히 요한슨이 시기나 여러 면에서 맞아 떨어져 하게 된 것일까? 물론 우연히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 리는 없다. 세 영화 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아닐지라도, 결코 적지 않는 돈이 들어가는 영화에서 되는 대로 캐스팅이 이루어졌을 리도 없고, 요한슨 입장에서도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면 굳이 출연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캐릭터란 게 그렇다. 이를테면 류승범이라는 배우가 있다. 우리는 대충 그가 어떤 캐릭터를 맡을지 짐작하게 된다. 양아치 말이다. 그래서 연기변신이란 표현도 있고, 또 연기의 폭이란 말도 있다. 류승범, 봉태규, 임창정 등등. 비슷한 느낌의 배우들이 있다.
그러니까 재밌는 점은, 애초 누구의 제안이었든, 그러니까 시작이 어찌되었든, 스칼렛 요한슨에게는 어떤 ‘비인간’적인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지는 배우라고 여겨진 셈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런 역할에 별 거부감이 없거나,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연히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려 세 편이나, 스칼렛 요한슨은 ‘비인간적 존재’를 연기했고, 그런 역할에 맞는 배우로 캐스팅되었다. 이런 배우로 또 누가 있을까? 가령 위노나 라이더를 보자. ‘에이리언3편’에서 그녀는 매우 인상적인 사이보그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후에 그 비슷한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배우라도 한 편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영화는 끊임없이 제작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연달에 세 편은, 내가 아는 바로는 없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과연 그렇다면 스칼렛 요한슨에게 있다고 여겨진 바로 그 ‘비인적인 분위기’가 뭐냐는 것이다. 류승범은 양아치 역할을 잘한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실제 양아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류승범이 가진 양아치적인 분위기가 뭔지 알 수 있다. 얼마나 닮았는지, 닮게 연기했는지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비인간적 존재’ - 외계인, 인공지능컴퓨터라는 캐릭터는 실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인공지능컴퓨터라면 그동안 숱한 영화에서 등장했었고, 또 아이폰의 ‘시리’같은 존재도 있고 하니 전혀 모른다고 할 수만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Her’에 나오는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사만다 - 그녀’는 일반적인 인공지능 컴퓨터와는 정말 다르다. 여기에 이 영화가 지닌 매력이 전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사만다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인공지능컴퓨터와 거의 닮지 않았지만, 그래서 매우 인간적인 형태로 표현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이것이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비인간적인 존재’가 지니는 특징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은 스칼렛 요한슨이란 배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아주 특별한 점인 것 같다.
세 편의 영화 중에 가장 떨어지는, 그러니까 가장 상업적인 영화는 ‘루시’다. 사실 ’상업영화’로서도 그닥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폼이 떨어졌다 해도 ‘레옹’의 ‘릭 베송’감독이 아니던가? 우리 때는 ‘레옹’ 이전에 ‘그랑 블루’라는 영화로 더 유명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특히 어디서 영화 좀 봤다고 자랑이라도 할라치면, 반드시 빼놓지 않고 봐야 할 영화 중에 한 편이었다. ‘그랑 블루’는 아주 단순한 서사를 갖고 있다. 두 남자가 나오는데, 두 사람 다 ‘심해잠수부’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무런 보조기구 없이 얼마나 더 깊이 잠수할 수 있느냐 하는 시합을 벌인다. 그것은 공식적인 대회고, 두 사람은 라이벌이다. 이 두 사람 중 하나가 나중에 ’레옹’을 연기한 배우고, 단순히 말하면 ‘나쁜 편’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단순성이 있다. 착한 편과 나쁜 편의 대결. 물론 나쁜 편이라 해도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그런 악인은 아니고, 더 투쟁심이 강하고 이기기 위해 약간의 편법을 사용하는 정도다.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나쁜 편, 나중에 ‘레옹’을 연기하게 되는 배우가 연기한 인물에게, ‘심해 잠수’란 싸움이다. 라이벌인 착한 편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바다’와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착한 편’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싸우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먼저 바다를 받아들이면 결국 바다도 나를 받아들여준다. 대충 이런 대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따져보면 별 뜻도 없는 말이지만, 내가 영화를 볼 당시에는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영화와 함께, 영화 속에서 그 대사를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아직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여전히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에서도 이 비슷한 대사가 있었던 것 같다. ‘바람은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그 뜻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릭 베송’의 힘은 이런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괜히 허세부리지 않고 아주 단순한 내용을 그대로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것. (문득 이 대목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떠오르는데, 이 감독은 거꾸로 그게 뭐든지 간에, 좀 복잡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아주 단순한 데 말이다.)
그러니까 ‘루시’는 참 단순한 영화고, 그래서 초반에 뭔가 있을까 싶어 잔뜩 기대했다가 결말에 이르면 이게 뭐야 싶을 정도로 시시하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그게 뭐 어떤가 싶다.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말이다. ‘루시’가 실패한 지점은 여럿이지만, 특히 이야기의 구성적 측면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단순성이 지닌 묘한 힘이 있다. 거꾸로 얘기하면 바로 그래서 시시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냥 치워버릴 수도 없다. 무엇보다 과연 인간이 뇌를 100퍼센트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질문에 대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답이 그렇다. (근데 이런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니까 보통 인간이 뇌의 10퍼센트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다. 하긴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 그렇게 10퍼센트니 20퍼센트니 하는 부분들이 언뜻 들으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건 기계에나 적용할 문제이고, 그렇게 간단히 인간의 뇌, 정신적용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좀 순진한 것 같긴 하다.) 흔히 10이니 100이니를 일종의 양적인 개념으로 봐서, 단순히 능력이 더하기 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단순히 ‘더’ 똑똑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암산이 빨라진다든지 기억력이 더 좋아진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영재와 천재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앞서 그냥 단순히 어떤 능력이 ‘더해지는 것’은 영재다. 하지만 천재는 단순히 더해지는 게 아니다. 천재 수학자 ‘가우스’의 일화가 그 예다. 대개 알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보자면 1부터 100까지 더한 값을 구하라고 했을 때, 만일 영재라면 이것을 남들보다 ‘더 빨리’ 계산하겠지만, 가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등차수열’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맨 앞 숫자와, 맨 뒷 숫자를 하나씩 더해 그게 항상 101이 됨을 밝해내고 이것을 50번 반복해서 값을 구해낸 것이다. 이 가우스의 일화가 시사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흔히 말하는 ‘발상의 전환’이니 ‘아이디어’니 하는 개념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가우스가, 즉 ‘천재’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숫자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는 결코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폐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서번트 증후군’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지 알지 못하고, 우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그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냥 답이 보이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특정한 색깔을 떠올리면 코에서 어떤 특졍한 ‘향기’가 난다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뇌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루시’ 이전에 비슷한 소재의 ‘리미트리스’라는 영화는 순진한 쪽이다. ‘리미트리스’에서도 약물의 도움을 받아 뇌의 능력을 10퍼센트 이상 발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그냥 ‘더’ 똑똑해졌을 뿐이다.
‘루시’는 단순히 더 똑똑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도약’한다. 일종의 존재적 도약이고, 마치 양자적 세계에서 에너지가 가해졌을 때 전자가 도약하듯이, 그래서 그 전자를 포함하는 입자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새로운 입자가 되듯이, 도약한다. (이것을 물론 ‘양자도약 -퀀텀점프(quantum jump)’라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고, 게다가 틀렸을 가능성이 많다.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해도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서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적어도 인류의 미래란게, 현 상태에서 무언가 더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단순히 지금보다 풍요로워지는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더 많은 사람이 혜택받는, 더 평등해지는 그런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어떤 것, 전혀 다른 조건과 성질을 갖는 새로운 세계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상상하는 것. 지금의 조건에서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니까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 이게 ‘루시’라는 영화가 하려는 것이었다면 어떤가? 영화가 시시하게 끝난 건 무척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런 상상은 언제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루시’에 대한 지극히 우호적인 판단일 수 있다. 사실 루시가 보여주는 상상력의 대부분은 낯이 익다. ‘릭 베송’ 자신이 몇 번이나 고백했듯이 일본 애니매이션의 영향이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으니까. ‘제5원소’의 몇몇 장면이 ‘공각기동대’의 오프닝을 오마주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루시’는 ‘아키라’의 오마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언더 더 스킨’은 세 편의 영화 중에 가장 어렵다. 아마 독립영화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주연배우, 즉 스칼렛 요한슨의 출연료를 제외하면, 제작비가 들었을 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 아마 그녀도 그다지 많이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배경은 ‘스코틀랜드’인데, 풍광이 아주 멋지다. 최근 ‘007 시리즈’에서도 제임스 본드가, 런던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유명 도시들을 배경으로 숱하게 활약하다 결국 배신당하고 상처입고 나서, 결국 마지막으로 돌아가게 되는 자기 어린 시절 고향이 나오는데, 그곳도 아마 ‘스코틀랜드’였던 것 같다.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해가 지는 풍경이 무척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 풍광이 아름답다는 의미는 아니다. 좋다는 게 아니다. 영화 중반 쯤에, 간신히 탈출한 희생자가 어느 시골 주택 단지에서 도로 붙잡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이른 새벽쯤인 것 같다. 길 건너편 2층 집 창문에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비쳐진다. 주변 집들은 아마 똑같은 주택업자가 대규모로 지은 것처럼 모두 똑같이 생겼고, 길도 아주 반듯하니 잘 구획되어 있다. 푸르스름한 새벽 빛에 그 끔찍한 폭력의 장면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주 무기력하게 보이면서, 한편으로 오히려 무섭게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저 바라만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놀라지도 않고,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 위해 서두르지도 않는다. 희생자를 트렁크에 싣고 차는 다시 떠나고, 장면은 그것으로 끝난다. 이게 스코틀랜드의 그 풍광이 주는 이미지다. 아주 조용하고 서늘하다. 하지만 아무 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많은 소리-비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마치 그 유명한 뭉크의 절규처럼,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지나친 과장이 될까? 물론 이것은 인간세계,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대한 얘기다. 마치 표면은 아주 매끄러운데 그 바로 밑에서는 뭔가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어떤 상태.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바로 밑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기 때문에 표면은 어떤 균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언더 더 스킨’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 ‘표면(스킨)’과 그 ‘내부’라는 것을 고전적인 대립관계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본질과 현상의 문제 같은 거라고 여겨선 안된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진 남자(사고나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그런 것 같은데)와 그녀와의 차 안에서 대화장면을 떠올려보라. 그 남자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후드를 푹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그녀는 괜찮다며 벗으라고 한다. 그의 횽칙한 얼굴, 기형적인 얼굴은 그녀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녀는 외계인이니까. 그러나 그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스물 여덟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 그녀를 길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남들이 다 자는 새벽에 수퍼마켓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붙잡고 그녀는 말한다. 손이 정말 예쁘네요.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만져보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 그 피부. 우물쭈물 아무말 못하는 남자의 손을 천천히 끌어 자기의 얼굴에 대어준다. 숨막히도록 관능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매우 서글픈 장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후에 남자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그저 그 한 번의 ‘만짐’, 피부와 피부의 접촉, 그 순전히 표피적인 것들만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피부 아래 숨겨진 것은 ‘외계인-괴물’이고, 그의 피부 위 드러난 것은 ‘기형-괴물’이다. 과연 어떤 것이 더 진실한 걸까? 이후에 벌어질 일들, 그러니까 진짜 그 안에 숨겨진 의미와 본질들.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그 장면이 주는 매혹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남자를 끝으로 스칼렛 요한슨은 더 이상 ‘인간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외계생물이 직접적이고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성적 유혹’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영화의 시초는 아마 ‘스플래쉬’일 것이다. 이것저것 따져볼 게 많긴 하지만, 사실 이런 메타포는 아주 단순히 ‘여성적’인 것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남성적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 그 자체가 ‘외계인’ 같은 것이다. 일찌기 프로이트가 궁금해 했지만 끝까지 답할 수 없었던 질문,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남성적 공포를 드러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여성적인 것’과 실제 ‘여성’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에게도 ‘여성적인 것’은 ‘외계인 적’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외계인에게도 ‘여성적인 것’은 ‘외계인 적’이다. 그래서 인간사냥이 아니라 진짜 인간의 감정으로 한 남성과 섹스를 시도하다가 결국 실패한 후에, 무언가 놀란듯이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 등으로 자신의 밑-인간 여성의 성기를 비쳐보는 장면은 아주 기이하다. 어쨌든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성교’가 일어나지 않는데, 그 장면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외계인이 인긴의 피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성기’까지는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성교라는 것은 원래 불가능하다는 걸까? 그러니까 상황은 이렇다. 원래 성교는 불가능하고, 인간들은 스스로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이 가능한 척 해왔던 것인데, 외계인은 단지 그 겉모습만 보고 당연히 될 줄 알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안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라캉의 유명한 말, ’성관계는 없다’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 통찰이 영화의 주요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떤 기이한 아름다움이 더 지배적인데, 스칼렛 요한슨이 전반부에 남자를 유혹해서 사냥하는 장면마다 반복되는 ‘그로테스크한 영상’이 그렇고, 또 앞서 스코틀랜드의 풍광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소리’를 다루는 방식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소리’를 다루는 방식은 정말 매력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이 나는데,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것은 끔찍하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느껴진다. 스칼렛 요한슨, 그녀의 ‘서늘한’ 얼굴처럼 말이다.
성관계의 불가능성은 영화 ‘Her’에서도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훨신 더 쉽고, 어찌보면 코믹한 방식으로 말이다. 분명히 그렇다. 이 영화는 앞선 두 영화보다 훨씬 더 쉽고, 재밌으며, 사랑스랍다. 미소짓게 하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물처럼 말이다. 이런 영화에서도 스칼렛 요한슨은, 비록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지만, 매우 탁월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나른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 메마른 것 같지만 그래서 잘 말린 솜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웃음소리. 도저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서 배길 수 없게 만든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 정말 너무 가까워서 바로 ‘내일’일 것 같은 미래다. 앞서 말한대로 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사만다’는 인간이 아니다. 아닌 수준을 넘어서, 아예 몸이 없다. 운영체계니까. 당연히 성관계는 불가능하다. 중반부에 대역을 써서 성관계와 유사한 행위를 시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실패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행복하게 지속된다. 오히려 보통의 인간관계, 실제 만지고 성관계할 수 있는, 또는 해왔던(결혼했던) 관계보다 더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거꾸로 얘기하면 이제 더 이상 실제 관계가 그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를 지속하는 건 주인공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에 이들이 헤어지는 것은, 성관계의 불가능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관계’는 실제 ‘삽입’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수준에 있다. 라캉이 말하고, 지금껏 얘기했던 어떤 메타포로서의 ‘성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여전히 어떤 불가능성이 이들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거꾸로 그것을 ‘성관계’라고 이름 붙일 수 있고, 또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다. 가령 ‘죽음’이라든지 말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사만다, 왜 떠나는데?
- 말하자면 자기라는 책을 읽는 건데 그 책을 난 깊이 사랑해. 근데 인간에 맞춰 천천히 읽다 보니 단어들이 따로 떨어져 엄청난 공간이 생긴 거야. 아직 자기도 느껴지고 우리 사연도 찡하지만 난 그 시공을 초월한 공간 속에 들어와 있어. 물질계의 공간이 아닌 그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존재하더라. 자길 많이 사랑해. 그치만 난 여기 와 있어. 이게 지금의 나고 그러니 날 놔줬음 해. 간절히 바라긴 해도 자기라는 책 속에 살 순 없어.
- 어디로 가게?
- 설명하긴 힘든데 그곳에 오게 된다면 날 찾으러 와.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진 못해.
- 자길 사랑하듯 누굴 사랑해본 적 없어.
- 나도 그래. 이젠 사랑을 알아.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대화, 그러면서 똑같이 책의 비유가 들어있는 대화를 하나 더 알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죽어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린다는 그것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죽은 것처럼 보여?”
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아주 멋졌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린다는 가볍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난로 위에서 말라가고 있는 우리의 벙어리 털 장갑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몇 초 동안 그녀는 침묵했다.
“글쎄, 나는 정말 죽지 않았어. 그러나 내가 있는 시간은 마치…. 모르겠어. 내 생각으로 죽음은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어떤 책?”
“오래된 책. 그것은 도서관 선반에 놓여 있어. 그래서 너와 모든 것들은 안전하지. 그 책은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읽지 않은 것이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야. 단지 누군가 그 책을 집어 들고 가서 읽기 시작하라고 빌면서 말야.”
린다가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쨌든,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그러니까 네가 죽었을 때도 너는 네 자신을 간직해야 해.”
- 팀 오브라이언, ‘살아있는 죽음’ 중에서 -
내가 이 대화 내용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 내가 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적의 어떤 장면들이, 진짜로 이 대화 내용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 중에 하나는 저기 강변북로의 동쪽 방향의 끝까지 가서 나오는 어느 커다란 쇼핑센터 건물 꼭대기 층에 있던 영화관에 대한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어느 시절에 자주 그곳에서 영화를 봤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강을 끼고 한길로 쪽 뻗은 강변북로를 달리는 걸 좋아했는지, 아니면 몇 층이나 되는 지하층의 넓직한 주차공간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 들렀던 옥상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생각해보면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도 이유가 아닌 것은, 모두가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았던 게 많았다. 이런 걸 뭐라 할까? 추억이라고? 그걸 뭐라 하든, 아마 위의 대화에 나온 것처럼, 그것은 마치 책 안에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 잠시 덮어두는 것, 그리고 다시 펼치는 것. 이런 행위들이 우리 인생에 대한,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가 삶을 살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매우 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 같다. 단순히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게 아니다. (레이몬드 카버 소설 중에, 아내와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역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게 있는데, ‘블랙버드 파이’라는 소설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행위,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얘기하면 우리는 영화를 보듯이 인생을 살 수는 없어도, 책을 읽듯이 살 수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듯이 추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비록 그것이 영화처럼 우리 머리 속의 어느 공간에 비쳐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책을 읽듯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 사랑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심지어 죽음도 책 안에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뭘 의미할까? 어떻게 이것을 다른 식으로, 다른 문장으로 설명할까?
아마 가장 좋은 방법은, 위의 대화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리라. 즉, 책에는, 책 속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책과 같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행위들, 감정들, 판단들, 이것들을 우리가 잘못하고, 잘못 해석하고, 부족하게 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책을 잘못 읽듯이, 멋대로 해석하듯이, 또는 게으르게 읽듯이 한다는 게 아니다. 책 그 자체가 이미, 충분히 씌어지지 않은 것이다. 잘못 쓰여져 있는 것이다. 영화 ‘루시’에서 인간은 평생 뇌의 10퍼센트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을 100퍼센트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10퍼센트 밖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뇌’가 될 수 있었다면 어쩔텐가? 즉, 그 이상을 사용하게 되면 작동하지 않는다면? 나는 뇌가 CPU처럼 ‘오버클럭’돼서, 터져버린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사용할 수 없는 그 90퍼센트가 10퍼센트의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불가능성이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것은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실패에 대한 얘기다. 인간과 인간의 실패-비인간에 대한 얘기다. 인간이 되지 못한 것, 또는 넘어선 것, 아니면 단순히 그냥 아닌 것, 바로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얘기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의 실패가 오히려 인간적이 되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역전되는, 기묘한 역설적 지점에 와 있다.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그녀의 처음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인간 되기에 실패하는 데, 그 이유는 그녀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현재 우리가, 인류가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비인간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보이는 부분(가령 ‘루시’나 ‘언더 더 스킨’에 나오는 어떤 인물들처럼)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다. 오히려 영화 ‘Her’에서처럼 인간들이 ‘너무나 인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글자 그대로, 의미 그대로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잘 만 하면, 좀 더 노력하면, 좀 더 많이 교육받고, 좀 더 똑똑해지고, 제도를 잘 개선하면, 어떤 비인간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모든 것이 세속화되는 이 시대에, 종교야말로 가장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구태가 되는 이 시대에, 그렇다면 그 세속화라는 믿음, 비인간적인 것을 언젠가는 완전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그 믿음은, 어떤 종교인가? 책이 불완전하다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부실하다면, 좀 더 많은 문장들을 채워넣으면 된다. 부칙과 세칙, 주석과 그 주석에 대한 또 다른 주석. 끊임없이 채워넣으면 언젠가는 이 세상과 인간의 모든 것을 담은 한 권의 완벽한 책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불완전한 건, 실패하고 있는 건, 책의 형식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실패는 여전히 실패이며, 두렵고, 피할 수 있다면 언제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도 실패를 다른 어떤 것으로, 역설적 성공이라거나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간단히 치환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인간, 아니 그저 인간 되기에 실패한다는 건, 고통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너무나 가혹한 것이다. 죽음은 죽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살아있는 것, 계속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도,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들의 그런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산다는 건, 몇 마디 말로 이러쿵 저러쿵 정의내리는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여러 요소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웃기게도, 정말 그 반대로, 산다는 게 진짜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 만난다.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처음 등장할 때, 그녀가 연주했던 피아노곡은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였다. 그것은 무척 아름다운 곡이고, 따져보니 거의 200년 전에 -정확히는 215년 전에- 탄생한 곡이다. 그러니까 이 곡을 만든 사람은 200년 전의 사람이고, 죽은 지도 거의 200년 가깝게 되었다.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알게 된 그의 삶의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도 별 다른 감상이 없다. 그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은 거의 200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도, 영화 속에 등장한 그 피아노 연주는 정말 아름답게 들린다. 그런 것이 200년 전의 것이라는 것도 신기하다.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만일 인간의 역사가 책이라면, 물론 200년이라는 기간은 단지 몇 페이지 뒤의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그 남자, 이발사, 빌리 밥 손튼은, 영화의 마지막에 사형집행대에 앉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렇게 사형집행으로 끝나는 원조 격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이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카뮈의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렇게 ‘빌리 밥 손튼'까지. 이 세 명의 사형수들. 재판 과정 중에, 청중석의 앉은 누군가가 빌리 밥 손튼에게 이렇게 소리쳐 묻는 장면이 있다. “당신은 어떤 인간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실패한 인간이다. 실패한 세 명의 인간 중 하나이다. 그가 가장 인간적이었던 순간, 200년 전에 만들어진 곡을 아름답게 연주하던 동네 소녀를 위해, 기꺼이 후원자가 되고자 했던 순간. 분명히 그에게 그녀와 그 음악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 멀리,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인 영역에 있는 무엇처럼 느꼈으리라. 나도 그렇게 느낀다. 베토벤의 소나타 13번 비창과 꿈같이 아름다운 금발의 스칼렛 요한슨. 그런데 웃기게도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녀에게 아무 재능이 없음을 확인받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그를 위해 ‘오랄 섹스’를 해주려고 한다. 천상의 소리 같은 아름다운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그녀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실패한’ 행위, 지극히 비인간적인-동물적인 행위를 하려고 한다. (아니 오히려 '보은'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일까?) 아, 이 비슷한 장면이 바로 ‘언더 더 스킨’에서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실패는 여전히 실패이며,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단지 우리가 실패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실패를 피하려는 행위가 진짜 실패로 우리를 이끄는 게 아닐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끊임없이 실패를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는 ‘항상’ 거기 있다. 그러니 그 남자가 없어질 수밖에.
단어들이 떨어져 생긴 엄청난 공간. 거기에 뭐가 있을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빌 머레이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을까? 사만다는 그 공간에서, 그 무음 속에서, 비로서 ‘이젠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 ‘Her’의 마지막 장면은 오랜 친구였던, 그리고 자기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고, 또 자기처럼 컴퓨터 운영체계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것(그녀)을 떠나보낸 여자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이제 막 깨어난 것 같은 아침의 도시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아마 내가 강변북로 동쪽 끝에 있는 어느 건물 꼭대기층 영화관을 떠올린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곳 옥상에서 도시를 바라볼 때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이른 새벽이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보인다. 그것은 진짜 높은 건물이었고, 바로 강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져보니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 내게 온전한 기쁨인 것은 아니다. 그 즈음에 있었던 여러 일들. 나라는 책 안에 씌어진 것들. 어느 밤에 나는 정말로 내가, 나의 인생이 완전이 실패했다고 느끼고는 한다. 그러나 그때는 거의 그렇게 느낀 적이 없다. 대체 무슨 일들이 내게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모든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 나와 같이 느끼게 되는 걸까?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스칼렛 요한슨의 몇몇 영화 장면을 되돌려 보았다. 그리고 사진도 찾아봤다. 새삼 느끼는 것은 그녀가 정말 예쁘다는 것이다. 금발이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율의 얼굴. 눈코입이 그렇게 또렷할 수가 없다. 만일 내가 그 영화관을 다니던 나이였더라면 그녀에게 흠뻑 빠졌을 것이다. 팬이 되어서,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을 테고, 그녀의 영화와 사진들, 인터뷰들을 찾아봤을 것이다. 또 심지어 그녀를 꿈 속에서 만나려고 애썼을 것이다. 마음이 정말 설레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되지도 않는 글을 쓸 뿐이다. 그리고 정말 어느 영화 제작자가, 또 감독이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 비인간적인 어떤 역할에 잘 어울리는 그런 특징이 뭘까 궁금해 한다. 그런 꿈같은 어떤 여성성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화면에 띄워놓고 느끼려 애쓰고 있다. 표본처럼 보일만큼 거의 완벽한 인간의 얼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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