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한국소설들(영화들) - 이혜린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손아람 “소수의견” 본문

독후감

한국소설들(영화들) - 이혜린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손아람 “소수의견”

물고기군 2016. 1. 25. 17:36


나는 한국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한 개 시장, 즉 우리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과, 세계적으로 - 적어도 두 개 이상 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 중에, 어느 게 더 좋은 소설일 확률이 높느냐 하면, 아무래도 후자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장이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어떤 세계적인 작가의 소설보다 더 훌륭한 한국소설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과연 내가 얼만큼이나 시간을 쓸 수 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정말 좋은 소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 전부를 내가 읽을 수도 없는데, 이를테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도 다 찾아서 읽기에 시간이 부족한데, 굳이 모험을 찾아 떠날 이유가 없는 것 같디. 


물론 이것을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라고만 볼 수 없는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소설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잣대 자체가 사실 분명하지도 않고, 내가 한국인이므로, 한국소설에는 분명히 한국인으로서의 나에게, 특별히 소구하는 면이 존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어떤 공감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까 막말로 작품의 수준이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좀 떨어진다해도 한국소설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존재하고, 그런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거의 읽지 못했지만, 예전에 읽었던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나는 한국소설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왜? 그것을 여기에 설명하기는 좀 곤란하다. 또 그럴 자격도 나한테는 없는 것 같다. 한국소설에는 뭉뚱그려서 분명히 ‘한국소설적’인 면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한정된 소설만을, 또 그것도 아주 예전에, 읽은 나로서는 설혹 나의 생각 속에 그런 게 있다 해도, 입 밖에 내 말하기는 어렵다. 당연히 그런 나의 생각은 거의 맞을 리가 없다. 한국소설도 정말로 많은 것이다. 단지 문학상을 받은 소설이나, 이름있는 작가의 소설 몇 권 읽고 한국소설이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결코 바람작하지 못하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해도, 다시 얘기가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도 나는 한국소설에 별로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두 편의 한국소설을 읽게 되었고, 비록 그것이 나의 생각 전부를 바꿔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떤 종류의 편견은 확실히 깨트려줬다. 그것은 각각 이혜린의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와 손아람의 “소수의견”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두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이자, 내가 이 두 작품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한 첫 번째 공통점은, 둘 다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 공통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둘 다 주인공이 ‘전문직’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이전에 소설은 그 직업의 세계를 꽤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작품들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혜린의 “열정같은…”은 신문사 연예부 기자, 손아람의 “소수의견”은 변호사다. 나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열정같은…”의 경우에는 작가인 이혜린이 진짜 연예부 기자 생활을 했고, “소수의견”의 작가인 손아람은 비록 변호사는 아니지만 어느 소개글에서 소설이 꽤나 리얼하게 ‘법정’씬을 다뤘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미리 말하자면 그런 나의 의도는 충분히 채워졌다. 분명히 외국소설에도 이런 전문직 소설들이 있고, 그중에는 이만큼, 또는 이보다 더 훌륭한 소설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외국의 이야기다. 게다가 시기적으로도, 내가 읽은 것들은 모두, 이전 시대의 것들이었다. 그에 반해 위 두 소설은 한국의 이야기다. 또 소설이 출간된 게 2010년 정도로 시기적으로도 거의 동시대라 할 만 했다. 그러니까 바로 여기, 바로 이 시대에, 신문사 연예부 기자는, 또 변호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그 직업의 특징이나 변화 등이 무엇인지, 소설을 통해 꽤 소상히 알 수 있게 된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분명히 ‘한국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작가에게 있는데 둘 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정식 등단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그렇다. 그런데 이게 중요할까? 그러니까 등단작가가 아니라는 점이 그들의 작품에 어떤 공통된 특징을 부여할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들의 작품이 덜 문학적이거나, 어떤 기준에 못미친다는 (이를테면 등단의 기준) 의미에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 기준에서 자유롭다는, 즉 ‘문학적’이고자 하는, 어쩌면 ‘문학 그 자체’만으로 자족하겠다는, 그런 욕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 말은 그 결과로 그들의 작품이 덜 문학적이다, 라는 것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게 아니다. 그것과 이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문학과 ‘덜’ 문학, 또는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가르는 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거기에 꽤 뚜렷한 경계가 있다고 본다. 그것을 개별작품들로 나누는 건, 예를 들어 백 여편의 소설을 모아놓고, 순문학 작품과 대중문학 작품을 가르는 건 어렵다하더라도, 내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이들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작품이 적어도 ‘대중문학’으로서는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이다. 굉장한 완성도를 갖췄다고 본다. 단순히 이들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 즉, 대중적으로 성공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지 않았다해도, 그러니까 실패했다해도 매우 성공적인 대중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작품은 더욱 뚜렷히 ‘순문학’과 구별된다. 다르게 말하면 실패한 ‘순문학’과 실패한 ‘대중문학’을 가르기는 오히려 더 어렵다. 


네 번째 공통점 역시 작가에 관한 것인데, 이 역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두 작가 다 소위 ‘명문대’ 인문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김혜린은 성균관대 영문학과고, 손아람은 서울대 미학과다. 이것의 의미는 뭘까? 최근의 취업난, 특히 인문계의 취업난이 이 정도 ‘명문대’를 나오고도 소설 시장에 뛰어들어야할 만큼 (거의 돈이 되지 않는) 심각하다는 걸까? 농담이다. 나는 감히 이것의 의미를 이들이 매우 순수한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는 걸 증명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또는 매우 순진하게 말이다. 전혀 비꼬는 그런 말이 아니다. 소설에 그런 게 드러난다. 나는 이들이 매우 즐겁게 작품을 썼다고 느낀다. 다른 면에서는, 매우 성실하게 썼다고 느낀다. 명문대를 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어쨌든 학창시절을 꽤 성실하게 보냈다는 게 아닌가? 순수나 성실이나, 이런 단어의 의미를 나는 매우 개인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 싶다. 그래서 그런 품성들은 - 실제로 그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 한편으로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 모범생스럽다고나 할까? 하지만 분명히 굉장한 강점으로 작용하는 면이 더 많다. 무엇보다 ‘소수의견’을 보면, 나는 작가가 굉장히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다.


다섯 번째 공통점은,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두 작품 다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그 영화들이 모두 망했다는 것이다. 영화가 망하는데에는 수십, 수백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전문직’을 다룬 영화이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망한 이유는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두 영화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커보인다. (사실 이 차이점은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영화에서 더 두드러진다.) ‘열정같은…’은 전형적인 ‘주인공 성장형 코메디물’이다. 대개 이런 영화에는 ‘로맨택’적인 요소도 들어가는데, 거의 비슷한 분위기가 있지만, 남녀주인공을 맡은 정재영과 박보영의 나이차가 커서인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둘의 관계는 멘토링의 관계에 가깝다.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다.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물론 여기에 ‘현실반영적’인 측면, 88만원 세대니, 청년실업이니, 비정규직이니, 또 연예부 기자로서의 고충이나, 소속사와 연예인의 갈등 구조 등등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거의 양념조차도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거의 영화의 맛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혀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건 아니다. 사실 나는 이런 ‘주인공 성장형 코메디물’을 꽤 좋아하는데, 거기에는 항상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인공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니까. 주인공에 감정이입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화 자체로는 ‘매끄럽지는 않아도’ 거의 그런 목적에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원작’의 정말 ‘좋은’ 부분들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코메디적인 요소는 좋다. 원작도 결코 심각한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심각하다. 결코 가벼운 얘기가 아니고, 그렇게 끝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남자주인공인 정재영이 문제다. 원작에서 정재영은, 즉 연예부 ‘부장’은 결코 멘토가 아니다. 악역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지만, 결코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때문에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는데, 영화만 보고 어느 기사에서 그 ‘정재영’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 사람을 밝힌 것이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소설을 떠올리며, 저런 ‘인간’이 여전히 잘 나가는구나 느꼈다. 물론 원작과 영화의 그 ‘부장’이 동일한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간단히 말해서 영화와 소설은 전혀 다른 얘기다. 물론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각색은 필요하다. 어떤 부분을 잘라내고, 어떤 부분은 과장하고, 또 어떤 부분은 ‘바꿀 수’도 있다. 이를테면 새드엔딩을 헤피엔딩으로 바꿀 수 있다. 관객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소설 자체도 ‘코메디’다. 이런 류의 소설을 아마 ‘칙릿’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다른 ‘칙릿’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칙릿이라는 장르 규정만을 놓고 본다면, 소설은 거기에 매우 충실하다. 아니, 이 정도만 된다면, 결코 ‘칙릿’이라는 용어를 어떤 폄훼의 의도로 써서는 안될 것 같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중 누구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조차도 결코 ‘좋지’만은 않다.) 이 말은 똑같이 아무도 완전히 ‘나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코메디’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좀 ‘웃기다.’ 좀 ‘서글프’기도 하고,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 ‘코메디’적인 요소, ‘웃음’을 빼버리면, 이렇게 끔찍한 세상이 없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보면 비극이다, 라는 흔한 격언을 여기서 써도 될까? 선과 악,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웃음’뿐인 것 같다. 그 짧은 순간, 금방 스러지고 마는, 단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한 그런 것만이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그 순간에, 바로 그 ‘웃음’으로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나 태도가, 얼마나 부끄러운 건지,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또 얼마나 서글픈 건지 깨닫게 된다. 소설은 그런 면을 매우 탁월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빠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영화가 이 소설을 완전히 왜곡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원작자라해도, 아쉬워하고 씁쓸해할지언정, 결코 화가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웃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가 ‘원작’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서 만들어졌다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랬더라면, 망해도 좀 맘이 편했을까? 


반면에 ‘소수의견’은 원작에 매우 충실하다. 영화를 먼저 만들고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알고봤더니 원작자인 ‘손아람’이 직접 각본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랬다고 하니까, 이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솔직히 영화가 더 나은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윤계상을 도와주는 서울대 천재 법대 교수 ‘이주민’이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윤계상이 맡은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일인칭 화자 소설이라서, 이름이 안 나왔을수도.) 영화를 보고나서 소설을 읽은 탓인지 그가 나올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든다. 겉돈다. 거의 아무 역할이 없다. 어떤 느낌이냐면, 나중에, 소설의 결말쯤에 이르러 어떤 반전을 일으킬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범인’이라든지 말이다, 그런 것 없이 그냥 끝이 나고 만다. 심지어 자기 본연의 역할, ‘법률적 자문’에 있어서도,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를 왜 등장시켰을까? 그리고 왜 영화에서는 뺏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이주민’이라는 인물이 소설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즉, 작가 자신의 어떤 주장이나 의도를 드러내고자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그 의도라는 게 너무 뻔히 보인다는 데 있다. 아니, 의도라기 보다는, 그러니까 이 소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소설 자체, 또는 세상을 대하는 작가의 근본적인 태도에 가깝다. 가령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래 문장을 보자. 


“이들은 단지 한 세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정당이 자신들의 이권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 자기 아들이, 또 자기 손자가 희생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회의해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사람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


간략히 이 장면만 설명하자면 주인공이 맡은 사건 - ‘용산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세입자와 철거용역 또는 경찰의 대치 과정 중에 발생한 살인 사건 - 때문에 재개발이 지연되자 원주민들이 재개발 공사 재개를 촉구하며 주인공을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주인공의 진술이다. 이 진술이 맞을 수도 있다. 그들, 재개발을 촉구하는 원주민들이 정말 ‘인지능력’이 부족하고, 즉, 사태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또한 피해자일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것, 바로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얘긴데, 그건 주인공이다. 또한 작가이기도 하다. 나는 작가의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도 맞을 수 있다. 작가가 생각한 그 ‘진실’이 정말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소설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렇게가 어떻게냐면, 여기에는 두 가지 ‘일치’가 존재하는 데 첫째는 작가의 진실과 세상의 진실의 일치, 두 번째는 작가의 진실과 주인공의 진실의 일치다. 소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일치’ 중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이 정말 ‘일치’할까 라는 의심이 소설을 이끈다. 물론 너무 순진한 작가는 재미없다. 하지만 그만큼 재미없는 건, 영악한 작가다. 순진한 작가는 세상의 거짓에 속는다. 하지만 영악한 작가는 진실에 속는다. 만일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면, 또 그것을 진실되게 말할 수 있다면 왜 소설을 써야 하는가? 소설은 ‘진실’을 알 수 없고, 또 설령 ‘알 수’ 있다 해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쓰여진다. 이 (할 수) 없음이, 이 단단한 침묵의 이유가,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인물이 탄생하는 곳, 인물이 말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열정같은…’의 인물들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더욱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웃기다. 이 웃김은 다분히 시트콤적인데, 그것은 또한 ’열정같은…’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다. 각 장들은 마치 시트콤의 한 회분 에피소드같다. 과장되어 있고, 장면 전환은 때로 너무 빠르고, 감정들은 압축적이고 뜬금 없을 때가 더러 있다. 이에 반해 ‘소수의견’은 차분하고 꼼꼼하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취재가 동반되어 있는 것 같다. 정말 현실에서 일어난, 또는 일어날 수 있는 일들만, 고르고 골라서 소설에 쓰여진 것 같다. 하지만 진짜 현실적인 인물은 ‘열정같은…’쪽이다. ‘열정같은…’도 당연히 연예부 기자였던 작가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소재를 빌어왔기 때문에 분명히 ‘비현실적인’ 것, 작가가 아무 것도 모르고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이 ‘현실적’이고 아니고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뭘 잘 안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뭘 모른다해서,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으로만 쓰여졌다해서 비현실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비현실이 되게 만드는 것, 비현실을 현실이 되게 만드는 것, 그 ‘움직임’ 속에 있다. 왜냐하면 어떤 현실적인 것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하면, 비현실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에서 일어난 일, 철거민과 용역/경찰, 더 나아가서 국가와의 대립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고, 아마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다. 그곳에서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지극히 공을 들인 공판과정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만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가 발견할 거라 기대했던 진실, 작가가 이미 알고 있어서 풀어내기만 하면 드러나리라 믿었던 진실은,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의미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적어도 소설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다. 


나는 ‘소수의견’의 결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다른 결말이 되어야 한다든지, 해피엔딩이라든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현실 속에,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비현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현실, 다르게 말하면 그 ‘비진실’에 다가가기에는, 소설 속 인물들은 너무나 똑똑하다. 그들은 작가의 ‘진실’에 충실하지만, 그럼으로써 작가를 결과적으로 배반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달한 진실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를 용서하고 싶다고, 정당방위였다고 그 아버지가 주장했을 때, 검사는 그게 무슨 의미인줄 아냐고, 그것은 그렇게 죽임을 당한 아들이 또한 살인자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부들부들 온 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문제는 작가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작가는 그 비극적인 현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이어서 ‘현실적인 비극’인 ‘그 일’이 바로 ‘아들을 잃어버린 두 아버지의 화해’라는 미담으로 결론나길 바랐던 걸까? 나는 이 결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결론,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다르게 말하면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모른채 가짜 ‘적’들을 향해 증오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그런 결론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 또한 틀렸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화해가 현실적이냐 아니냐도 아니고,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냐도 아니고, 그게 올바르냐 올바르지 않느냐도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결론에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진짜 적이 ‘국가’라는 사실이다. 작가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틀렸느냐, 몇 번이나 반혹해서 말하지만, 이런 질문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생각에는 ‘현실적’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확실히, 아까 증언대에 선 아버지의 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맞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때, 전경이 아들을 죽이고, 그 아버지가 다시 그 전경을 죽인, 바로 그 순간에,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가 만들어졌고, 떨어져나왔다. 그것은 이전에 없던 것이었고, 이후에 사라질 것이었다.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것, 말이 그것을 포착하려고, 그것을 말이 되는 어떤 것으로 만들려 할 때마다,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말들 중에 하나가 바로 ‘국가’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국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또한 그것이 결과인 한에서는 ‘국가’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에 불과하고, 즉, ‘헛소리’에 불과할  수 있고, 소설이 이러힌 인식에 나아갔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아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결코 이 소설의 ‘궁극적인’ 문제점이 아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진짜 문제점은 이 소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진짜 ‘현실’을 놓친다. ‘열정같은…’의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이 소설 속에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좀 ‘웃기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의 인물들은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이 꼭 웃겨야 된다는 게 아니라, 그 ‘웃음’에 상응하는 일종의 ‘비정상’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영화는 소설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런 인물이 있다. 바로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대립했던 검사 ‘홍제덕’이다. 영화와 소설 모두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사실 홍제덕의 역할, 하는 일, 대사, 성격 등등은 거의 바뀐 점이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홍제덕은 훨씬 더 빛이 난다. 어쩌면 이것은 홍제덕 역할을 맡았던 ‘김의성’이라는 배우의 힘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사실, 거의 모든 면에서 검사 홍제덕이라는 인물은 ‘권력 지향적인 나쁜 검사’라는 ‘클리셰’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또한 1인칭 화자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특성상, 소설에서, 그의 존재감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무언가, 장면이나 대사 등이 더 덧붙여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일종의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중심사건이 되었던 1심 공판이 끝나고 몇 년이 흐른 후 법원 앞에서 우연히 주인공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검사 홍제덕은 빛나는 대사 한마디를 던진다. “끝까지 들어, 임마.” 이 짧은 장면에서, 이 대사가 나오기 전까지 홍제덕은 주인공에게 존댓말을 한다. 표정은 부드럽다. 물론 좀 비아냥 거리는 느낌은 있지만. 하지만 이 대사 이후에 존댓말은 사라지고 표정은 차갑게 바뀐다. 사람이 확 달라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가면이 벗겨진 것 같다. 이 장면 또한 소설과 거의 일치한다. 대사를 압축한 것 외에는 내용에 아무 변화가 없다. 이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냐 했을 때,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또 작가 입장에서는 그랬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판 과정에서 외압은 없었다는 것이다. 홍제덕의 말이다.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냥 자기가 알아서 국가를 위해 일을 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통치 방식이 개인에게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는 일종의 통찰을 전달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거기에 굉장한 새로움이 있느냐 했을 때 나로서는 별 감흥이 없다. (소설과 영화 전체가 그렇다. 분명히 어떤 새로운 사실들, 어떤 통찰을 전달하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위에서 인용한 ‘원주민’들에 대한 주인공의 묘사, 즉, 같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의 ‘진중권’의 트위터에 나올 법한 내용들에 불과하다. 물론 그러한 내용도 분명히 날카로운 면이 있겠으나, 그것은 이미 다 ‘고려’되어 있는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끝까지 들어, 임마’ 이 대사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윤계상이 대충 인사치례 말들을 나누고, 검사에서 물러나도 여전히 ‘전관예우’ 대접을 받으며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된 홍제덕에게, 그리고 그러한 현실 자체에 대해, 경멸과 씁쓸함을 담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뜨려 할 때, 영화적 구성에 있어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그 뻔한 만남 장면에서, 갑자기 홍제덕은 안면을 싹 바꾸며 윤계상에게 명령한다. ‘끝까지 들어, 임마.’ 뭘 들으란 걸까? 물론 이후에 나오는 대사를 들으란 얘기다. 외압은 없었다 등등. 하지만 그것 또한 이미 말했듯이 별 내용이 없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들어, 임마’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뭐든 끝까지 들어라, 내가 말한 것은 언제나 최종적인 내용이 아니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뭔가 반박하고 싶다거나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을 때, 비웃거나 무시하고 싶을 때, 나는 항상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끝까지 들어. 임마’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다. 결코 얘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게 정말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수의견’이라는 소설과 동명의 영화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대사’인 이유다.


‘열정같은…’이 원작에 충실하지 못해서 망하고, ‘소수의견’은 원작에 충실하고 어떤 면에서 그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었지만 망했다. 이 사실은 뭘 증명하는 걸까? ‘소수의견’이 ‘열정같은…’보다 더 후진 ‘소설’이라는 걸까? 하지만 나는 ‘열정같은…’이 원작에 충실했다 해도 반드시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것이 증명하는 사실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뭔짓을 해도 망한다는 게 아닐까? 농담이다. 이것이 증명하는 사실은 칙릿이라는 소재와 형태, 시트콤적인 구성까지 갖춘 ‘열정같은…’이 그 겉보기와 달리 ‘소수의견’보다 더 영화화하기 어려웠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원작의 느낌 그대로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비록 개봉하기는 어려웠지만 ‘소수의견’쪽이 훨씬 더 영화적 언어로 옮기기 쉬웠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또한 이것의 의미는 ‘열정같은…’이 소설이라는 형태에서만 담을 수 있는 무언가를 더 많이 가졌다는 뜻도 될 것이다. 물론 그게 소설의 ‘수준’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다만 ‘열정같은…’이 겉보기와 달리 장점이 많은 소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주제는 비록 ‘칙릿’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형식 또한 가벼운 ‘코믹’이지만 (게다가 제목도 무슨 ‘유행어’에서 따온 것 같지만), 결코 만만한 소설은 아니다. (카프카의 ‘변신’이 원래 코믹 소설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치면 ‘성’이나 ‘심판’도 정말 ‘웃긴’ 소설이다.) 그렇다고 ‘소수의견’이 후진 소설이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감탄했다. 작가의 얘기를 들어볼 수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나는 이 소설이 ‘레이몬드 챈들러’의 문장에 굉장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런가 라는 점이다. 문장만 놓고 본다면, 챈들러가 현대 한국에서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썼을 것 같다. 매우 단단하고 균형잡힌 문장이다. ‘열정같은…’도 마찬가지다. 제일 먼저 말해야 했을 것 같은데, 이 두 소설을 읽고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바로 그 ‘문장’의 훌륭함이다. 묘사가 뛰어나거나 시적이거나, 문학적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이 두 작가는 ‘문장’이 뭔지 아는 것 같다. 한국소설을 잘 읽지 않는, 번역된 문장만 주로 읽는 나에게 한국 작가의 한국 문장이란 게 이렇게 단단하고 좋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것 같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이 두 소설이 매우 훌륭한 ‘대중소설’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 정도만 되면 시간이 별로 아깝지 않다. 그러나 매우 훌륭한 ‘소설’이냐, 그러니까 이 작가들의 작품을 내가 더 읽고 싶느냐 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물론 그 차이가 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단지 ‘대중소설’이라서 그런 건지, 그렇다면 대중소설과 그냥 소설 또는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내 스스로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대중소설이라도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매우 훌륭한 ‘대중소설’은 그냥 소설로서도 매우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이나, 찰스디킨스, 심지어 도스도옙스키의 소설도 당대에는 분명히 ‘대중소설’이었던 것이다.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서, 나는 어느 정도 위에서 설명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특히 ‘소수의견’의 어떤 아쉬운 면에 대한 얘기에서 말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더 이상 매우 훌륭한 ‘대중문학’이 곧바로 매우 훌륭한 ‘순수문학’이 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얘기는 너무 어렵고, 또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이 글도 이미 너무 길다. 그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진짜, 너무 길게 썼다. 

Comments